이제 난 당신하고 절대 안 헤어져요
연지는 이후를 보며 눈으로 웃었다

한겨울의 토요일 아침이다.

45층 고층 아파트의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다.

어떻게 할까.

눈이 내린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다.

그래도 이후는 길을 나서기로 했다. 아주 옛날에 연지가 사준 외투를 옷장에서 찾아내 몸에 걸쳤다. 몸도 마음도 저절로 따뜻해지는 것 같다. 연지는 그렇게 자기에게 늘 따뜻한 존재였다.

하지만 연지는 지금 이 세상에 없다. 3주일 전쯤 이후는 모처럼 만난 대학 동창에게서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연지가 인터넷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등졌다고 했다.

ㅡ고등학생 애 하나, 여대생 하나, 그리고 30대 남자 하나에 연지까지, 도합 넷이었다더군.

이후는 45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3층으로 내려갔다. 잠깐 망설였지만 코란도를 몰고 가기로 했다. 이번 길에 벤츠는 어울리지 않았다. 연지의 숨결이 서려 있는 이 구형 코란도라야 했다.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와 무작정 양재 인터체인지 쪽을 향해 달렸다. 내비게이션으로 무, 량, 사, 라고, 세 글자를 찍었다. 두 시간 남짓 걸린다고 했다.

하늘은 잔뜩 흐리다. 금방이라도 눈발이 떨어질 것 같다.

만남의 광장에서 뜨거운 커피를 사들고 톨 게이트를 향해 달릴 때쯤 드디어 눈이 내렸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리는 소리가 났다. 액정에 뜨는 번호를 본다. 인수다.

또 무슨 할 말이 남았다는 것이냐.

ㅡ형님이슈?

ㅡ말해라.

ㅡ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수.

ㅡ누가 먼저 시작했나 생각해 봐.

인수 쪽에서는 잠깐 말이 없다. 이후는 대학 후배인 이 작자를 더 이상은 만나고 싶지 않다. 이후 생각으로는 며칠 전에 모든 계산이 끝났다. 십 년 넘게 동업해 왔지만 이제 정말 헤어져야 할 때다.

맨 땅 위에 회사 하나를 세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더구나 불경기가 계속되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달마다 부족한 회사 돈을 메우는 일이 끔찍한 과업이었다. 이후와 인수는 남의 돈을 끌어대 증자를 하고, 그러다 감자를 하고, 다시 남의 돈을 끌어들여 증자를 해나갔다. 실적이 아니라 남의 돈으로 자금을 보충해서 회사의 외형을 유지하는 방식이었다. 남들도 다하는 일이지만 법을 다 따라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돈을 댄 이들을 물 먹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회사의 몸체를 불려나가는 중에 숱한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다 끊어내는 일을 반복했다. 그래도 한때는 이 녀석만큼은 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ㅡ그만하면 너도 나한테 못할 일 많이 했다.

ㅡ알고 있수. 하지만 내가 눈 안 감았으면 콩밥을 먹어도 벌써 먹었을 거유.

ㅡ그래서 이렇게 참아왔지 않냐. 그동안 니가 회사 돈 축낸 게 얼만지 알아? 그걸 또 얘기하랴?

저쪽에서는 또 말이 없다. 이후는 이 침묵이 어쩐지 불안스럽다. 그럴수록 윤 검사를 동원하길 잘 했다고 생각한다.

ㅡ연지 형수 떼버릴 때처럼 이 몸을 팽개쳐 버리시겠다? 후후. 내가 이대로 물러날 거 같수? 두고 봐.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알아!

저쪽에서 핸드폰이 뚝 끊어진다.

사람 형상은 하고 있다만 사람 같지 않은 녀석이었다. 녀석은 이후의 약점을 미끼삼아 연봉도, 업무지원비도, 다른 직원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챙겨댔다. 공동대표라고 직함을 걸어놓고 나오는 날이라야 일주일에 이삼 일, 그것도 열 시가 넘어 겨우 기어 나와서는 사우나로 직행하면 그만이었다. 그래도 경영학과 출신이라고, 회계 돌아가는 사정은 독사눈 같이 날카로웠다. 이후는 눈엣가시 같은 녀석을 떼어버릴 기회를 잡지 못해 몇 년을 두고 전전긍긍하는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재주 좋은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 제 깜냥에는 감쪽같이 빼돌렸다고 여긴 돈의 흐름을 올해는 이후 쪽에서 세무사를 동원해서 몰래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이후는 이 거머리 같은 녀석을 내쳐 버리기로 작정했다.

웃기는 놈!

이후의 입에서는 저절로 거친 말이 흘러나왔다. 자기도 모르게 엑셀레이터를 세게 들이 밟았다. 윈도우를 향해 내달려오는 눈발 속에 연지의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그 날, 이후는 윤 검사를 청담동 참치요리 집으로 데려갔다. 일본에서 참치를 비행기로 직접 날라 온다는 곳이었다.

윤 검사를 마주 대하고 솔직한 심정으로 대강의 사연을 밝히고 인수 녀석을 떼어달라고 했다. 윤 검사는 꽤나 즐거워 보였다. 이후가 모처럼 자신에게 청탁을 해온 때문일 것이다.

ㅡ후쿠시마 원전이 어떻다고 해도 난 이 마구로가 좋습디다.

윤 검사는 술잔을 부딪치며 아주 유쾌해 했다.

ㅡ이 집 참치는 믿을 수 있지.

주방장이 들어와 눈물주를 차례로 따라 올렸다. 눈물주란 참치 눈알의 수정체를 술에 타서 만든 것이다. 이후는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지폐를 집히는 대로 꺼내 주방장에게 건넸다. 윤 검사 보라고 주는 것이다. 주방장은 두 손으로 지폐를 받아들면서 머리가 탁자에 닿도록 깊게 조아렸다. 주방장이 문을 닫고 나간 후 이후는 윤 검사에게 꽤나 두툼한 서류 봉투 뭉치를 건넸다. 윤 검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받아서는 들고 온 가방 속에 밀어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오십도짜리 특제 아와모리를 연거푸 들이킨 윤 검사가 이후를 노려보았다.

ㅡ위기는 기회라고, 지금이 좋은 때요.

이후는 윤 검사가 이미 취했음을 알아차렸다.

ㅡ누구? 나 말인가, 윤 검사 말인가?

ㅡ둘 다지. 하지만 순서로 보면 내가 먼저요.

이후는 윤 검사의 표정이나 말투에서 인수 녀석을 그대로 보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이후를 건너다보는 윤 검사의 눈초리는 섬뜩하면서도 메스꺼웠다.

ㅡ무슨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이군. 내게도 귀띔해 주시게.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된다지 않나. 이후는 술잔을 비운 윤 검사에게 아와모리를 또 한 잔 가득 따라주었다. 이 아와모리는 오키나와에서 만드는 것으로 국내에서는 좀처럼 찾기 어렵다.

윤 검사는 인수나 마찬가지로 어찌어찌 해서 알게 된 대학 후배였다. 처음에 만났을 때 나이를 맞춰 보니 이후와는 다섯 살 터울이 났다. 서른 살 갓 넘은 나이에 야심이 만만했다. 이후는 무슨 일에 소용이 될지 모르는 이 윤 검사에게 꽤나 공을 들여왔다.

ㅡ후후. 형님. 누가 나한테 이 세상이 어떤 데냐고 물으면, 내, 숨도 안 쉬고, 뜨거운 곳이라고 말해 줄 테요.

ㅡ뜨겁다? 그렇지. 불경에도 불타는 집이라고 했으니까.

ㅡ제가 한 번 말해 볼까요? 이런 땐 비유가 좋지. 나도 한땐 문학이 좋았으니까.

ㅡ비유?

윤 검사는 목젖이 환하게 드러나도록 술잔을 비우고 거칠게 내려놓았다. 이후는 자기도 술잔을 들었다 입술만 축이고는 그냥 내려놓았다. 윤 검사보다 주량이 센 자신이지만 오늘은 정신을 차려두어야 했다.

ㅡ이 세상은 말요. 풀도 나무도 없소. 다 타버렸으니까. 사막도 아니우. 모래도 자갈도 녹아버리고 없으니까. 그냥 끈적끈적하지. 발밑이 전부 구리물 아니면 쇳물이니까. 낮이면 태양처럼 뜨거운 화염이 하늘 끝까지 솟구쳐 올라. 사람들 살갗이 죄다 불길에 문드러지고 녹아내릴 지경이지. 그런데도 인간들은 살아 있어. 머리털이며 엉덩이며 다 타서 녹아버렸는가 하면 육체의 형상이 다시 만들어지고, 만들어졌는가 하면 다시 또 화염에 휩싸이는 거지.

ㅡ끔찍하군.

ㅡ아직 멀었어.

윤 검사는 이제 말을 내려놓는다. 술이 다 됐다는 신호다. 윤 검사는 두 눈을 감고 자기가 그리는 형상이 제 앞에 지금 펼쳐지고라도 있는 것처럼 눈동자를 굴리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ㅡ밤에는 모든 게 정반대가 돼. 이번에는 북쪽 끝에서 살을 에는 칼바람이 몰아쳐 와. 낮에 불길에 살이 문드러지고 내장이 녹아내리고 뼈가 다 드러난 인간들이 이번에는 북극에 몰아치는 눈보라보다 독한 칼바람에 몸뚱이가 죄다 깍여 나가. 입술이 떨어지고 손발이 시퍼렇게 변해서 뚝뚝 끊어져. 그러면 어느새 또 입술이며 손발이 자라나고. 고통이 끝없이 계속되는 거지.

ㅡ윤 검사 상상력이 보통 아니시네. 허허.

이후가 슬쩍 눙치는 사이에 윤 검사가 눈을 번쩍 떴다.

ㅡ상상력? 하지만 그게 진짜 현실이지. 내가 안 죽으려면 남이 죽어야 하는 이치.

그 순간 이후는 윤 검사의 눈동자가 그가 말하는 불지옥에서 이글이글 타고 있는 것 같다.

ㅡ윤 검사. 한 잔 하시게. 이번 일로 상심이 큰 듯하이.

윤 검사 말에 따르면 이번에 검찰총장이 떨려나는 통에 절친한 선배까지 한직으로 밀려났다고 했다.

ㅡ상심? 외려 아주 잘 된 걸. 차장이 부릅디다. 이번에 줄줄이 갈려나가면 나한테 기횔 주겠다고.

ㅡ그래? 잘 됐군. 축하할 일이네 그려.

이후는 윤 검사의 술잔에 자기 술잔을 부딪쳤다.

이후는 진심으로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후가 보기에, 이 작자는 그래도 인간미도 있고 염치도 아는 족속이었다.

그날 이후는 꽤나 취한 윤 검사를 기어이 역삼동까지 데리고 가서 여자를 붙여 주었다. 윤 검사가 골라잡은 여자에게는 팁을 후하게 집어 주고 2차까지 윤 검사를 잘 챙겨 주라고 부탁했다.

그날 밤 윤 검사가 그 여자를 어떻게 했는지, 자기가 건네 준 가방은 잃어버리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인수 녀석에 관한 문제가 풀리기 시작했다. 윤 검사에게 청탁한 일이 효험을 본 것이다.

이후는 내비게이션이 가르쳐 주는 대로 천안 쪽에서 천안논산 고속도로로 갈아탔다. 서논산 인터체인지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와서는 부여 쪽으로, 다시 외산 쪽으로 달렸다. 무량사가 가까워질수록 눈발이 더욱 짙어졌다. 이에 더하여 윈도우에 비치는 연지의 모습은 더욱 선명해졌다.

그때 이후와 연지는 버스를 타고 무량사에 갔었다. 남부 터미널에 가서 부여행 시외버스를 타고 부여에서 다시 외산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시내버스 좌석에 나란히 앉아 점심 대신 터미널 대합실에서 산 찐 달걀을 나눠먹으며 외산 종점까지 터덜거리며 갔다.

그때도 겨울이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솜털처럼 포근한 눈을 맞으며 정류장에서 무량사까지 함께 걸어갔다. 두 사람은 그때 만났다 헤어지고 헤어졌다 다시 만난 직후였다.

ㅡ이제 난 당신하고 절대 안 헤어져요.

연지는 이후를 보면서 한 눈밖에 보이지 않는 눈으로 웃었다. 이후 쪽에서도 연지를 향해 씽긋 웃음을 날려 주었다. 그것은 연지의 바람에 대한 응낙의 뜻을 담고 있었다.

그 무렵 이후와 연지는 함께 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한 달이나 되었을까 한 때였다.

ㅡ눈이 아파. 안 보여.

이후가 새벽녘에 집에 들어갔을 때 연지는 오른쪽 눈을 감싸 쥐고 신음을 하고 있었다. 이후는 그 무렵의 일들을 어떤 여자의 모습과 함께 겹쳐 놓고서야 기억할 수 있다. 그 여자는 분명 연지와는 다른 종류의 여자였다. 쾌활하고 감각적인 삶을 즐기는 여자였다. 그것은 그녀가 연지에게서 찾을 수 없는 쾌락을 주는 여자라는 뜻이었다. 새로운 여자와 하룻밤을 지새우고 돌아온 이후에게 연지가 겪고 있는 고통은 자기를 둘러싼 누추한 현실을 말해주는 듯했다. 자신은 이런 원룸이나 얻어 살아가는 일개 회사원에 지나지 않았다.

ㅡ아침에 병원 열면 같이 가 보자.

이후는 육체적 쾌락 뒤에 찾아오는 격심한 피로감 속에서 혼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은 토요일이니 푹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침이 되어 이후는 거의 열 시쯤 되어서야 눈이 떠졌다. 연지가 이후를 깨우고 있었다.

연지의 오른쪽 눈이 아주 빨갛게 충혈 되어 있었다. 이후는 겨우 몸을 일으켜 연지를 동네 안과 병원으로 데려갔다. 안과 병원에서는 연지의 눈을 검사해 보고는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종합병원 응급실로 들어갔다.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것 같았다. 전공 담당의가 오고 이것저것 검사를 했다. 또 한 시간을 허비해서야 결과가 나왔다.

실명이라고 했다. 급성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을 밤새 방치해 놓은 게 화근이라고 했다. 이후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연지는 외눈박이 물고기 같은 여자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망막을 상해 물체를 볼 수 없다고, 오로지 빛과 어둠만을 감지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일을 겪고도 이후와 함께 무량사 나들이에 나선 연지는 눈 속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 무량사 어귀로 접어드는 이후는 해맑은 연지의 얼굴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다왔다.

이후는 차를 주차장에 세워놓고 트렁크에서 배낭을 꺼내들었다. 배낭 안에는 그가 산에 갈 때마다 한 잔씩 따라 마시는 양주가 한 병 들어 있었다. 이후는 무량사 명부전에 연지의 사진을 올려놓고 술을 한 잔 따라 올려 줄 작정이었다. 그것으로 연지를 떠나보내는 의식을 갈음할 참이었다.

세상은 바야흐로 온통 눈 천지로 변했다. 이후는 눈송이가 펑펑 쏟아져 내리는 희끄무레한 세상 속으로 들어갔다. 일주문을 지나 피안교를 건넜다. 연지와 함께 피안교 건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도 이 아름드리 느티나무들은 눈을 맞으며 고요히 서 있었다.

천왕문에 와서 이후는 비로소 연지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아야 했다. 사대천왕을 무섭다고 말하던 연지의 얼굴 표정이 떠올랐다. 이후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그때는 연지만큼은 아니어도 자기도 얼룩이 그나마 덜 묻어 있었다.

천왕문을 지나 극락전 쪽으로 걸어갈 때쯤 세상은 아예 하얀 떡덩이 속에 들어앉은 것 같다. 그 희디흰 세상 어딘가에 이후를 바라보는 고요한 눈동자가 숨어있는 것 같다.

이후는 그것이 연지의 눈동자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후는 눈을 크게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연지의 맑은 외눈동자를 맞이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연지의 눈동자는 이후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연지는 지금 어떤 촉각으로나 느낄 수 있는 형체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후는 마치 자기 자신의 모습이 맑디맑은 연지의 눈동자에 비추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이후는 연지의 맑은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이때껏 자신이 생각해 왔던 것과 달리 몹시 초라했다.

회사 일에 진력이 난 이후는 그 무렵에 친해진 인수 녀석과 함께 회사를 뛰쳐나와 엠엔에이 사업을 시작했다. 말하자면 기업 사냥꾼이 된 것이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관련업체들에 지불해야 할 자금을 마련하느라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그래도 사업가라고 여자들이 달라붙었다. 그 중에는 술집 여자도 있고 유부녀도 있었다. 무엇보다 이후가 연지 문제만 정리해 준다면 사업 자금쯤은 넉넉히 융통해 줄 수 있다는 여자도 생겼다.

미국발 세계 경제의 침체는 이후가 뛰어든 엠엔에이 시장에도 타격을 가했다. 한 달 한 달, 하루하루가 피가 마르는 나날이 지속되었다. 분명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있는데, 이를 위해 필요한 자금이 없었다.

ㅡ나한테 와. 멋지게 살 게 해 줄 게.

지금의 아내가 된 여자의 유혹적인 목소리가 매일같이 이후의 귀에 환청처럼 울렸다.

마침내, 어느 날 밤, 이후는 혼자서 바에 가서 술을 잔뜩 마셨다. 작정한 대로 술기운을 빌려 연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빌 작정이었다. 제발 살려 달라고, 빚이 목을 칭칭 감아 와서 못 살겠다고, 당신만 날 놓아주면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눈물이라도 뚝뚝 흘려가며 울부짖을 작정이었다. 헌데, 아무리 마셔도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양주 한 병을 다 비우도록 오히려 의식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이후는 하는 수 없이 술 냄새만 풍길 뿐 멀쩡한 의식으로 이를 갈며 집으로 들어갔다.
 

몹시 취한 흉내를 내면서 연지를 몰아세웠다. 헤어져 달라고, 이 감옥 같은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악을 써댔다. 서투른 연극 같은 이후의 행동을 바라보는 연지의 눈에는 이후를 향한 연민이 가득히 담겨 있었다. 이후는 연지의 눈동자를 외면해 버렸다.

ㅡ이후 씨. 사랑보다 돈이 더 귀한 건가요? 잊었어요? 나, 당신하고 헤어지면 안 살 거예요.

이후는 연지의 말이 자기 목에 올가미를 씌워놓는 것 같았다. 여자를 벽에 밀어붙여 쓰러뜨리고 악담을 퍼부었다. 그 밤으로 간단한 짐만 꾸려서 집을 뛰쳐나왔다.

사업자금을 대주겠노라는 여자를 찾아가 온몸에 역겨운 교태가 흐르는 육체 속으로 파고들었다. 돈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그리고, 쾌락과 필요에서 시작된 관계인만큼 어느 만큼 시간이 흐르면 도로 자유를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계산도 명확히 서 있었다.

이후는 바야흐로 일대 유행이라는 연상연하 커플의 주인공이 되어 마침내 결혼까지 성사시켰다. 여자 쪽에서 한 번 결혼했었다는 사실이 지금 세상에서는 흠이 될 수 없었다.

과연 여자는 이후를 초조한 자금 조달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이에 때를 맞춰 몇 년씩 혼란과 어둠에 잠겨 있던 경제도 풀려나는 듯했다. 감자에, 증자에, 빚 끌어대는 것으로 연명하던 이후의 사업에도 빛이 비쳐들었다.

ㅡ역시 여자 하나는 제대로 갈아 치웠수.

룸살롱에서 인수 놈은 이후를 향해 능글맞은 웃음을 웃어보였다. 이후가 살아가는 방식을 속속들이 간파하고 있는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과 이후 사이에는 여자는 여자, 돈은 돈, 남자는 남자라는 암묵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ㅡ인생 뭐 있어. 큰 거 하나 잘 터지면 팔자 바꾸는 거야.

ㅡ두 말하면 잔소리지.

사업이 기름을 친 기계처럼 돌아가고 호주머니에 여윳돈이 생겨났다. 이후는 주식에 손을 대고 정선 카지노에도 출입하기 시작했다. 다 인수 녀석이 꼬드긴 일들이었다. 주식에서도, 카지노에서도 꽤나 손해를 봐야 했다. 하지만 주가를 알리는 막대 끝이 움직이는 순간들을, 손끝에 와 닿는 카드가 원하는 모양을 이루고 있을 때의 그 짜릿한 느낌들을 이후는 쉽게 잊을 수 없었다.

ㅡ형님. 마카오가 나아. 정선 같은 덴 애들 장난이야.

인수 녀석은 환각의 세상에 눈 뜬 이후를 더 깊은 수렁으로 끌어들였다. 녀석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날아간 마카오에서 이후는 마침내 별세계를 만났다. 마카오는 오로지 소비와, 쾌락과, 킬링 타임만을 위해 바다 깊은 곳에 지어놓은 수정궁이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었다. 인수 녀석보다 이후 쪽이 한 술 더 뜨기 시작했다. 탕아가 되는 일이라면 자신이 있는 이후였다.

이후는 마카오에서 사람들을 사귀었다. 그네들을 따라 필리핀으로까지 행동반경을 넓혔다. 한 달이 멀다 하고 마카오며 필리핀 마닐라 같은 데를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필리핀은 노름은 노름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좋았다. 호텔 카지노에서 게임을 즐기다 그날 걸려드는 여자를 호텔방에 데리고 가 뒹구는 것이다. 호텔 카지노마다 거기 둥지를 튼 여자애들이 지갑 묵직한 외국인 여행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100달러짜리 지폐를 단 몇 장만이라도 얻어 쥘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현지 여자들이었다.

어느 날은 인생 전부가 카지노에 매달려 있는 그런 여자애 둘을 한꺼번에 데리고 놀기도 했다. 인수 녀석과 동행했을 때는 각자 하나씩 끼고 이후의 호텔방으로 돌아와 트윈 베드에 번갈아 눕혀가며 일을 치르기도 했다.

그렇게 수없이 만난 여자들 가운데 기억에 남아 있는 여자가 하나 있었다. 마닐라의 헤리티지 호텔 카지노에서 만난 여자애였다.

호텔 카지노에서는 보통 동그란 칩을 가지고 논다. 하지만 VIP룸에 입장하면 칩 모양도 달라진다. 그런 큰 판에는 노랗게 빛나는 금딱지 칩들이 돌아다닌다. 이 금딱지들의 크기가 커지는 만큼 그것들이 표시하는 돈의 액수도 올라간다.

가령 마닐라의 VIP 룸에는 100만 페소짜리 금딱지 칩이 있다. 10만 페소짜리 딱지가 열 개가 되는 셈인데, 우리 돈으로 치면 2천500만원이 된다.

마카오에서는 규모가 더 크다. 최대 50만 홍콩달러짜리도 있다. 우리 돈으로 치면 7천500만원이나 되는 이 칩을 가지고들 던져가며 논다. VIP룸의 매니저한테 부탁하면 이 액수를 100만 홍콩달러짜리로, 두 배로 만들어 판을 키워 주기도 한다.

이런 금딱지 칩들을 판이 돌아갈 때마다 석 장도 가고 다섯 장도 간다. 그쯤 되면 이 카드놀이는 더 이상 노는 일이 되지 않는다. 개척시대 미국 서부 총잡이들의 목숨을 건 결투 같은 것이 되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이후가 그런 VIP 룸에 들어섰을 때다.

그 때 이후의 눈에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여자는 제 앞에 금딱지 칩들을 잔뜩 쌓아놓고 태연한 표정으로 패를 쥐고 있었다. 피부가 까맣고 윤이 흐르는 게 언뜻 필리피노 같았다. 필리피노 중에도 아주 가끔 돈을 주체 못는 희귀 족속들이 있다. 어떻게 보면 동남아시아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화교 핏줄을 타고난 것 같기도 했다. 어딘지 모르게 연지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이후는 잠시 여자가 비스듬히 보이는 곳에 섰다. 여자는 패를 쥐고 놀면서 금딱지 칩을 툭툭 던져대고 있었다. 코발트빛 나시 티에 아래는 하얀 미니스커트에 맨살이었다. 하이힐은 아예 구겨 신고 있었다. 담배를 꼬나물고 맛있게 빨고는 능숙하게 재떨이에 비벼 끄는 모양이 여간내기처럼 보이지 않았다. 판이 한창 이 여자 손에 놀아나고 있었다.

마침내 이후도 그 판에 끼어 앉았다. 전날에 꽤나 많이 따서 한창 기분이 올라 있는 이후였다. 이런 때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이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도 계속해서 딸 수 있을 것 같았다.

억 단위도 아니고 십 억 단위로 이 노름판에서 계속 따는 사람은 없다. 우연히 판에 처음 뛰어든 사람이 어떻게 해서 하룻밤 사이에 몇 억 원쯤 딴다고 해도 그 다음엔 반드시 훨씬 많이 잃게 된다.

한 번 따고 다시 그곳에 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좋은 추억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한 달이 채 못 가서 그 사람은 마닐라행 비행기에 다시 오른다. 환청이, 환각이, 그를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집 방 한가운데 가만히 눈감고 누워 있어도 칩이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번쩍 눈을 뜨면 천장이 눈부신 노름판으로 변해 있다. 잔뜩 쌓아 올려진 금딱지 칩들이나 엎어져 있는 카드패들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저것들을 당장 어떻게 해주어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이 고개를 쳐든다.

그렇게 해서 이후도 어제에 이어 오늘 다시 이곳에 들어선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밤 이후는 저런 계집애 따위는 능히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많은 일이 그렇게 돌아가듯 오늘 밤의 운은 이후의 것이 아니었다. 여자가 이후의 마지막 칩들을 쓸어간 다음에 이후는 허전한 심정을 끌어안고 호텔 바에 올라가 양주를 마셨다. 의자가 높아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허공 중에 떠 있는 사람처럼 이후는 술을 자꾸 들이켰다. 그렇게 얼마나 마셨는지 모른다. 문득 이후는 자기 귀에 들려오는 한국어를 들었다.

ㅡ내 방에 안 갈래요?

이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연지가 서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연지가 아니다. 자기 돈을 송두리째 쓸어간 여자다. 이후는 몽롱한 눈으로 여자를 올려보다 스트레이트 잔을 천천히 마저 비우고 일어섰다.

놀랍게도 여자의 방은 이후가 들어 있는 객실의 맞은편에 있었다. 이후는 혼란스러운 취기를 느끼며 여자를 따라 방으로 들어섰다. 객실 문을 닫아걸고 여자는 이후에게로 돌아왔다.

ㅡ이제부터 넌 내 노예야. 말을 잘 들으면 돈을 줄게. 니가 오늘 밤 잃어버린 돈의 일부를.

이후는 멍한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갑자기 돌변해 있다. 그러나 여자의 얼굴은 마치 손에 채찍이라도 들고 있는 것처럼 요염하다. 그 어느 곳엔가 연지의 해맑은 얼굴이 숨어 있는 것도 같다.

이제 이후는 눈 속에 서 있는 5층 석탑을 돌아 극락전으로 들어간다. 눈이 내려서인지 참배객이 없다. 이후는 배낭을 내려놓고 아미타삼존불을 향해 세 번 절했다. 마음속으로 연지로 하여금 극락왕생하게 해달라고 빌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후는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을 믿지 않는다. 다른 곳에서 말하는 천당도 믿지 않는다. 삶은 이 지상에 단 한 번 꽃처럼 피었다 사라지는 것이라고, 이후는 생각하고 있다. 스스로를 그렇게 납득시키며 살아왔다.

극락전을 나와 눈 내리는 절 마당을 지나 이후는 예전에 연지와 함께 걸었듯이 우화궁 너머 김시습의 초상화가 있는 전각으로 간다.

연지는 그때 답사 온 듯한 학생들 틈에 끼어 서서 스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ㅡ우린 이생과 최랑처럼 만났다가는 헤어지고 또 만난 거 있죠?

연지는 스님이 들려준 `금오신화`의 `이생규장전`이야기가 마음에 남은 듯했다.

ㅡ산 남자와 죽은 여자가 사랑할 수 있어? 다 지어낸 얘기야.

ㅡ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ㅡ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헤어지고 만나고 하는 거야.

ㅡ두 사람도 우리랑 같았나 보죠.

그때 두 사람은 똑같이 옛날 일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적어도 이후 쪽에서는 그랬다.

처음에 연지는 이후의 선배의 여자였다.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 선배를 향한 연지의 일방적인 사랑일 뿐이었다. 연지는 늘 선배 주위를 맴돌았지만 한 번 마음이 돌아선 선배는 그녀에게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는 이 과정을 지켜보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 이후는 첫사랑에 목숨을 걸고 있는 연지에게 마음이 이끌렸다.

어느 날 오후였다. 이후는 캠퍼스 한 모퉁이에서 그날도 선배의 자취를 찾고 있는 연지에게 말을 붙였다. 이때는 연지도 이후의 존재를 이미 깨닫고 있었다.

ㅡ그런 사람한테 매달려 어쩌겠다는 거죠?

이후의 눈빛은 그때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이후의 뜨거운 불길을 쏘인 연지는 한참만에야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ㅡ너는 몰라.

이후의 타오르는 눈동자에 비친 연지는 그때 제비꽃처럼 가녀렸다. 이후는 이렇게 가냘픈 여자가 믿을 수도, 의지할 수도 없는 사람에게 목숨을 걸고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 마치 자기 자신이 직접 그 선배에게 모독을 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ㅡ내가 책임져. 이제부터는.

이후는 연지에게 반말로 선언했다. 그것은 자신이 후배가 아니고 연인이어야 한다는 대담한 선언이었다.

그때 이후는 연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연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 지난 후에 이후는 자신이 연지를 사랑한 것이 어쩌면 연지를 사로잡고 있는 선배에 대한 질투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선배를 향한 연지의 애처로운 갈구가 이후로 하여금 연지를 가로채도록 했다고 말이다.

그로부터 열 달이 다 못 가서였을 것이다. 밤낮 없이 밀물처럼 다가서는 이후에게 마침내 항복해 버렸다. 그로써 모든 사태는 종결된 듯했다. 하지만 인생의 결말이라는 것은 당사자들이 삶을 모두 끝마치기 전까지는 성립하지 않는 미래일 뿐이었다.

연지를 손아귀에 넣고 나자 이후의 눈에는 갑자기 자기보다 두 살 어린 어떤 여학생의 모습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그 여학생을 건드린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이후 자신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연지보다 아름답지도, 착하지도 않은 여자애를 유혹하게 했을까.

그 후에도 이후는 여자들을 만나는데 게으르지 않았다. 하루에 세 여자를 차례로 상대한 적도 있었다. 점심때부터 여자를 끌고 모텔에 들어갔다 나와서는 저녁에 또 다른 여자애의 자취방을 찾아갔다. 밤이 늦어서는 연지를 찾아가 마지막 일을 벌였다. 마치 온몸이 거대한 성기가 되어버린 것 같은 나날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이후에게는 여자의 가볍고 무거움을 측정할 수 있는 안목이 남아 있었는지 모른다. 혼탁한 생활을 이어가면서도 결국은 연지와의 관계를 버리지 않은 것이다. 그 때 연지는 이후가 살아가는 방식을 어렴풋이 깨달아가는 중에도 이후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ㅡ나를 끝까지 지켜 줄 거죠?

연지가 이렇게 물을 때마다 이후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나 이후는 자신이 연지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기 안에는 무엇이라도 잡아먹어야 하는, 늘 배고파하는 괴물이 살고 있는 것이었다.

김시습의 전각에서 발길을 돌려 이제 이후는 오늘의 순례의 마지막 목적지에 당도했다. 그곳은 바로 명부전이다. 명부전 앞에 서서 이후는 자신이 처음부터 이곳에 올 작정이었음을 생각해 냈다.

이후는 닫혀 있는 명부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낮인데도 촛불들이 켜져 있다. 이후의 두 눈에 그곳에 모셔 놓은 위패들과 벽에 빙 둘러서서 자기를 바라보는 시왕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후는 파카 외투 위쪽 주머니의 지퍼를 열었다.

그 안에는 비닐로 싸서 간직해 온 사진이 한 장 들어 있었다. 이후와 연지가 지금보다 아주 어렸을 때 함께 찍은 스티커 사진이었다.

이후는 연지를 버리고 난 후에도 이 사진만은 버리지 않고 연지가 사 준 외투 안에 넣어두고 있었다. 이후는 자신의 모습까지 함께 담겨 있는 연지의 사진을 위패들을 모셔놓은 불전 위에 올려놓았다. 배낭 안에서 술병을 꺼내서 술병과 같이 넣어둔 등산용 컵에 양주를 따랐다. 두 사람의 스티커 사진 앞에 술잔을 올려놓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이후는 천천히, 그러나 쉬지 않고 절을 올렸다. 이때 그는 망자를 위한 의식의 예절조차 잊은 듯했다.

이윽고 절을 마친 이후는 불전 위에 올려 놓은 술잔을 물렸다. 명부전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마치 연지의 혼령을 받아들이기라도 하듯 술을 남김없이 비우는 그였다.

이후의 목구멍을 태우며 넘어간 술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러자 이후는 자신이 몹시 피로한 것 같았다.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시왕들의 눈빛을 마주 대한 채 이후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술기운 때문일까. 현기증 속에서 이후는 많은 것들을 보았다.

ㅡ이리와요.

그날 밤 자기를 묶어놓고 온갖 벌을 주던 연지를 닮은 여자의 알몸이 보였다. 그 위로 한때 연지의 눈을 피해 놀아나던 감각적인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인수 녀석의 능글맞은 얼굴 뒤로 윤 검사의 사나운 표정이 불쑥 솟아오르기도 했다.

ㅡ이 방은 더운 것 같군. 아니, 춥다.

이후는 자기도 모를 소리를 중얼거렸다. 꿈속에서인 듯 자기의 벌거벗은 몸을 본 것도 같았다.

ㅡ더럽군. 더러워.

이후는 무어라고 중얼거렸는데, 그것은 마치 자기 스스로 자기를 탓하는 소리 같기도 했다.

ㅡ괜찮아. 나는.

그랬다. 어둠 속에서 이후는 자신이 당장 목숨이 끊어져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분명 숨을 쉬고 있는데도 자신은 살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자기의 정신은 깨어 있는 듯한데, 명부전의 물상들은 전부 그에게서 멀찍이 물러나 있었다. 마치 우주 유영을 하듯 자신의 몸은 명부전 아래 깊은 어둠속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듯했다. 그것은 이후가 말로만 들어온 무저갱이라는 것이었다. 깊고 깊은 땅 밑 어둠 속에서 검은 구덩이가 괴물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 흑암지옥 속으로 이후의 몸뚱이는 다 떨어져 내려야 하는데, 그는 아직도 발밑이 닿지 않는 허방 속에 떠 있었다.

이후는 왜 이렇게 끝이 나지 않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꼭 감고 있는 자기 두 눈의 망막 속으로 이제껏 살아온 나날들이 딕셔너리가 넘어가듯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그 빛나는 종이조각 같은 페이지들을 바라보며 이후는 이제 자신에게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중얼거렸다. 세상에 태어나 볼 것을 모두 다 보았으니. 만나야 할 사람을 다 만났으니.

무엇보다 자신은 정말 연지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연지에게 돌아갈 길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ㅡ나를 끝까지 버리지 않는다 했죠?

연지의 다정한 목소리가, 정다운 눈빛이 지금 자기 곁에 머물고 있는 듯했다. 그러자 이후는 비로소 자신이 재산에도, 쾌락에도, 미래에도,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자유는 또 어딘지 모르게 텅 비어 있는 듯했다.

어느 결엔가 이후가 두 눈을 떴다.

▲ 글 방민호,그림 권정찬
눈이 내리는 날이어서인지 명부전 안은 일찍 깊은 어둠에 물들어 있다. 이 어둠 속에 연지를 홀로 남겨두고 떠나가야 했다. 이후는 알지 못했다. 이 어둠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 하지만 그는 일어서야 했다. 명부전 바깥세상 더 어두운 곳으로 떠나야 했다.

<끝>

/글 방민호·그림 권정찬

    글 방민호·그림 권정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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