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 윤병무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136쪽

1995년 동서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시인 윤병무(47)의 시집 `고단`(문학과지성사)이 출간됐다.

“서정시적 문법을 다양하게 변용하는 시적 개성의 풍요로움”으로 가득했던 첫 시집 `5분의 추억`이후 꼬박 13년을 두고 다시 묶은 두번째 시집이다. 등단 20년에 가까워가는 그의 시력에 단 한 권의 시집은 어쩌면 직무유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랫동안 `책의 연혁`에 마음 둘 줄 아는 출판편집인과 살뜰한 네 식구의 가장으로서 그의 삶은 결코 게으르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그렇게 시집 `고단`에는 일상의 서정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슬픔의 윤리학을 통한 도덕적 지향, 이것이 윤병무 시의 핵심이고 그의 생활이 추구하는 목적이기도 하다.

고단하고 때로 비루한 삶의 하중을 두 어깨로 버텨내며, 생활하는 자의 슬픔이 아니라 생활이라는 삶 자체의 슬픔을 겨냥한 시들은 소박하면서도 통절하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예리하다. 바로 그 슬픔을 윤리의식 삼아 인간 삶의 보편성을 응시하게 하는 도덕적 자아를 만나보자.

어둠에서 일어나 “먼동처럼 천천히 눈을”(`숲속이용원`) 뜬 시인은 간밤에 꾼 꿈을 비릿한 자신의 눈물자국으로 더듬는다. 그의 낮 시간은 지난밤, 지나온 시간과 장소, 마주해온 사람과 사물의 흔적 즉 일상의 공간을 묘사하고 시간의 뿌리가 뻗어 나가는 것을 추적하느라 소리 없이 부산하다.

“유용한 것들은 하나같이 자연(自然)의 시간을 다 채우지”(`엄마 은행나무`) 못하지만, 누구나 한 번뿐인 오늘의 삶은 핍진(逼眞)하다. 그의 몸은 소시민의 외투에 감싸여 있지만 그의 미망(未忘/迷妄)은 시(/시작)에 불들려 “그 바람처럼 나도 이 세상 잠시 빌려/가끔 종잇장 구기고”(`저작권`) 있다. 그리하여 “그칠 줄 모르는 폭설을 견디고 있는 소나무처럼” 꺾이기 전까지 시인은 “겨울 가고 부러진 가지에 돋는 송진처럼 진물 맺히면/지워도 지워도 사라지지 않는 문신(文身) 같은/상처가 손바닥을”예언과 마주”하고 “제 차례가 올 때까지/혼자 준비”(`예언`)하겠노라 다짐한다.

 

▲ 윤병무 시인

멀리 있는 시간과 기억을 가까운 곁으로 끌어와 앉히는 윤병무의 시어와 시구가 그 평이함 속에서 불러일으키는 공감의 파장은 오래 지속된다. 텅 빈 밤, 누구나 혼자일 수 있고, 그래서 고독할 수 있고, 그래서 착하건 악해지건 딱히 간섭받지 않을 수 있고, 그래서 솔직해질 수 있는 시간이다.

보편적인 삶에서 찰나의 사건을 포착하고, 말(시어)을 길어내며 기어이 공감을 이끌어내는 시인의 약점을 굳이 밝히자면 윤리적 책임에서 한순간도 자유롭지 않다는 것. 단적으로 그의 시적화자는 착하다. 약삭빠르게 일처리하고 자기 잇속 챙기는 사람이 `난놈`이라는 세상인심에서 그는 한참 비껴서 있다. 구어체에 담긴 부부의 한밤 풍경은 또 얼마나 적요(寂寥)하고 다정한지.

“훗날에는 함부로 사는 제가 아내보다 먼저
세상의 손 놓겠지만
힘 풀리는 손 느끼고 나니 그야말로
별세(別世)라는 게 이렇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날 오면 아내의 손 받치고 있던
그날 밤의 저처럼 아내도 잠시 제 손 받치고 있다가
제 체온에 겨울 오기 전에
내려놓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고는

아내 따라 잠든
제 코 고는 소리 서로 못 듣듯
세상에 남은 식구들이
조금만 고단하면 좋겠습니다”(`고단(孤單)`부분)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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