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지붕위에 보주를 얹은 작압전, 작압전 내 사천왕 석주
산사에 가면 일주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중문을 통과하면 비로소 법당 앞에 서게 된다. 이처럼 사천왕문을 지나는 것이 그 통과 과정인데 특이하게도 청도 운문사에 가면 사천왕문이 없다.

운문사 경내에는 때마다 막걸리를 마신다는 처진 소나무(천연기념물 제180호)와 금당 앞 석등(보물 제193호), 동호(銅壺·보물 제208호), 원응국사비(보물 제316호), 대웅보전(보물 제 835호), 삼층석탑(보물 제678호)이 있고, 통일신라 말기의 것으로 보이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17호)과 사천왕 석주(보물 제318호)가 까치의 전설을 담고 있는 `작압전(鵲鴨殿)` 안에 봉안되어 있다.

작압전은 보양국사가 창건했고, 고려 숙종 10년에 원응 국사가 중창했다. 그 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었는데, 이름 그대로 건물이 까치집 모양을 하고 있고 운문사 경내 전각 중에서는 가장 작은 건물이다. 건물 전면에 `鵲鴨`이란 편액이 걸려있는데 편의상 `작압전`이라 부른다.

작압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사모지붕 건물이다. 보통 사모지붕 꼭대기에는 절병통을 얹어놓는데 이 건물은 사모지붕 꼭대기에 보주를 얹어놓아 불탑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아마도 건물 편액을 `작압전`이라 하지 않고 단지 `작압`이라 한 것도 본래는 전각이 아니라 전탑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의 종무소 중앙에 위치해 있었던 것을 1941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당시 안에 있던 석조여래좌상과 사천왕석주는 절반가량이 흙 속에 묻혀 있었다고 한다. 사찰에서 사천왕은 사천왕문 좌우에 봉안되는 것이 보통인데 운문사는 그렇지 않다. 아마도 114㎝~128㎝ 높이의 화강석에 새겨진 사천왕석주는 원래는 전탑에 장식된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신라 진평왕 때 세속오계를 제정한 원광법사가 주석하고, 고려 충렬왕 때 일연스님이 삼국유사 집필을 시작했다는 천년고찰 운문사의 역사는 1500년 전 신라의 대작갑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가 불교문화를 꽃 피우며 삼국통일을 위해 국력을 신장시킬 무렵 오갑사(五岬寺, 동쪽에 가슬갑사, 남쪽에 천문갑사, 서쪽에 대비갑사, 북쪽에 소보갑사, 중앙에 대작갑사)를 창건하였는데, 그 다섯 개의 사찰 중 대작갑사가 운문사의 전신이다.

운문사는 창건 당시 작갑사였던 것이다. 중창을 했던 보양국사가 작갑사의 옛터를 찾기 위해 현 북대암에 올라가서 살필 때 찬란한 빛을 발하는 황금탑 주위에 까치 떼가 모여든 것을 보고 작갑사의 옛터를 찾게 된다. 까치 떼들의 도움으로 작갑사를 중창하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까치 작(鵲)자에 오리 압(鴨)자를 써서 작압전을 짓고 작압사라 불렀으며 고려 태조가 운문선사라는 사액을 내리면서(937년) 이때부터 운문사라 불렸고 호거산도 운문산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영남이공대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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