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93년에 발행한 그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편집자가 조건 없이 허락해준다면 감은사에 대한 답사기를 원고지 처음부터 끝까지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아! 감은사…” 이렇게 쓰고 싶다고 하였다.

지금도 찾는 이들이 많지만, 대구-포항 고속도로가 생기기전에는 대구와 인근의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바다 중의 한 곳이 문무대왕암이 있는 경주시 감포읍 봉길리 일대였다.

경주시가지에서 보문단지와 덕동 댐을 지나 봄. 여름에는 신록에 취해, 가을에는 울긋불긋한 단풍에 취해 산길을 달리다보면 어느새 곧게 뻗은 감포읍의 지방도와 만나게 된다. 시골에서는 보기 드물게 곧게 뻗은 도로여서 20대에 친구들과 이곳을 찾을 때는 우리끼리 `감포 아우토반`이라고 불렀던 도로이다. 이 도로의 끝자락이자 대종천과 동해가 만나는 지점에 도착하면 왼쪽 해발 240m의 연대산 남쪽 기슭 언덕위에 우뚝 솟은 3층 석탑 두기가 보인다. 감포의 동해바다를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가본 곳이고 너무나 유명한 감은사지 삼층석탑이다.

감은사지는 경주시내에서 약 35km 거리의 동해변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구역은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1번지 일대로서 절터가 위치한 마을은 속칭 탑골 또는 탑 마을로도 불리고 있다. 언덕위의 절터에서 2시 방향의 동해안 어귀를 바라보면 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룬 문무대왕 해중릉으로 전해지는 대왕암이 한눈에 보이는데, 이곳에 절터를 잡은 것은 기록에 나타난 호국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고 판단된다.

삼국사기 만파식적조에 의하면 `제31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하였다`고 하였다. 이외에도 기록을 종합해보면 감은사는 문무왕대에 창건되기 시작하였으며, 문무왕 사후인 신문왕 원년(682년)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처음 문무와이 창건할 당시의 사찰 성격은 알 수 없으나, 문무왕릉의 조영과 함께 신문왕이 삼국을 통일한 부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감은사`라고 사찰명을 부여함으로써 원찰의 기능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문왕은 감은사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 일주일은 문무왕의 유해를 대왕암에 올라 산골하는 장례의식과 감은사의 낙성식이 함께 진행되는데 필요한 기간으로 생각된다. 만일 그렇다면 아마도 신라의 여러 사원 가운데 가장 성대한 의식이 감은사에서 장기간 베풀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절터는 1960년과 1979년~1980년 발굴조사를 통해 유물이 수습되었고 절터의 전모가 확인 되었다. 감은사는 일당쌍탑식(一堂雙塔式) 가람으로서 남북의 길이보다 동서회랑의 길이가 길게 구성된 점과 금당을 중심으로 동서의 회랑을 연결하는 중회랑인 익랑(翼廊)을 둔 점이 특이하다.

절터의 남쪽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문지가 있고, 중문 좌우로 후면의 강당지에 이르기까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감은사지에는 중문의 북쪽이자 금당 앞 좌우에 같은 형태의 삼층석탑 2기가 있다. 이 두 석탑은 682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오랜 세월동안 자연환경에 노출되어 있었다. 따라서 지속적인 크리프(creep)―일정한 하중상태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재료의 변형이 증대하는 현상이다.― 현상으로 부재의 열화, 이완, 파손, 풍화현상 등으로 붕괴의 위험과 훼손이 우려되어 시차를 두고 각각 해체보수 하였다. 서탑은 1959년에서 1960년까지 일차 보수를 하고 2007년부터 2008년까지 해체보수를 하였다. 동탑은 1995년부터 1996년까지 해체 보수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탑이 해체 보수과정에서 사리함이 발견되었는데 1959년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함은 보물 제366호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1996년 동탑에서 발견된 사리함은 보물 제1359호로 지정돼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국보 제112호인 동서삼층석탑은 제일 윗부분인 찰주까지의 높이가 13m로 국내의 현존하는 석탑가운데 가장 큰 탑이다.

신라석탑은 삼국통일과 함께 백제와 고신라의 각각 다른 두양식을 통합하여 새로운 양식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처럼 새로운 양식으로 집약, 정돈된 신라석탑의 시원적인 양식의 표본이 바로 감은사지삼층석탑과 고선사지삼층석탑이다. 특히, 감은사지삼층석탑은 신라와 백제의 삼국시대 말기 석탑 양식이 하나로 집약된 새로운 양식으로 신라석탑의 규범을 이루는 시원적인 석탑이다. 건립 연대가 확실하고 고졸한 자태를 간직한 거대한 규모의 석탑으로 시대에 따라 부분적으로 다소의 변화는 있지만, 이러한 형식은 오랫동안 유지되어 신라석탑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우리나라 석탑의 대표적인 형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많은 부재로 구성된 방식은 백제석탑과 공통되지만, 백제석탑이 목조 탑파를 충실히 모방하고 있는데 비해서 감은사지삼층석탑은 기하학적으로 계산된 비율에 의하여 짜인 새로운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지붕모양의 옥개석과 공포를 약화하여 표현한 옥개받침과 기둥을 그대로 표현한 별석(別石)의 우주(隅柱), 다층(多層) 등 목조 탑파를 모방한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지대석을 갑석보다 더 많이 내밀고, 갑석의 이음 위치를 탱주 위에 두고, 낙수면과 옥개받침석의 이음 위치를 서로 엇갈리게 두어 상부 하중을 분산시킨 조탑기법은 초기 석탑에서만 볼 수 있는 부재 결구 기법이다.

동서 두 탑은 전체적인 형식과 구조는 말할 것도 없고 각 부재의 치수까지도 같다. 다만 상하층 기단 부재 모양에 있어서 약간 차이가 있을 뿐이다. 기단부와 탑신부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고, 상륜부 노반 위는 결실되어 없어진지 오래이지만 찰주(擦柱)가 남아 있다. 감은사는 문무왕이 부처님의 힘을 왜구를 물리치고자 절의 이름을 진국사(鎭國寺)라 하였으나 절을 완공하기 전에 위독하게 되어 승려 지의법사에게 “내가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겨 이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안장하였으며,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이름을 감은사로 고친 것이다. 이러한 유언의 흔적은 금당의 구조에도 반영되어 있다.

금당의 바닥구조는 H형의 받침석과 보를 돌다리처럼 만들고, 그 위에 장방형의 석재유구를 동서방향으로 깔아서 마치 돌 마루를 얹어 놓은 것 같이 되어있다. 그 위에 주초를 배열하고 건물을 세웠던 특이한 구조로서,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을 감은사의 금당에 들어오게 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도 부합하고 있다. 금당 북쪽의 강당지는 원래 정면 8칸, 측면 4칸이었던 것을 , 후대에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고쳐서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 때 금당 아래에 용혈(龍穴)을 파서 용으로 화한 문무왕이 해류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감은사는 황룡사. 사천왕사 등과 함께 호국의 사찰로서 명맥을 이어왔으나, 언제 폐사가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문헌을 살펴보면 대체로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