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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산책-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이노센스'>

윤희정 기자
등록일 2005-01-21 14:31 게재일 2005-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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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형·포항지역사회연구소 사무차장
인간의 기억이, 그의 모든 생애가 저장된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다만 0과 1의 이진법으로 ‘네트’에 저장된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다운로드 할 수 있다. 어디서 다운로드 받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저장된 내용이 중요한가. 바꾸어 말하면 정신이 중요한가, 육체가 중요한가.

인간과 사이보그(육체를 기계화한 인간)와 인형로봇(기계화된 육체를 가지고 있으나 영혼이 없이 오직 인공지능만을 가지고 있다)이 공존하는 가까운 미래. 소녀형 인형로봇이 소유주를 죽이고 자폭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9년만에 돌아온 '공각기동대'의 후속편 '이노센스'는 다시금 디지털 시대의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은 ‘나는 존재한다. 그렇다면 존재란 무엇이며, 무엇으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가까운 미래, 생각의 영역을 신과 인간의 문제로 확장하여 보아도 별다른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이 인간을 창조하였을 때, 언제라도 육체를 바꾸어가며 영혼을 이식하는 존재(인형로봇과 사이보그)는 무엇인가?

태초에 하나님이 자신의 모습을 본 떠서 인간을 만들었으나, 오시이 마모루의 영화에서는 인간이 인간의 모습을 본떠 인형로봇을 만들고, 이 인형로봇에 영혼을 집어 넣으니 가까운 미래에 인간은 신과 같은 짓을 한다.

육체의 문제를 벗어버리고 영혼의 문제만을 가지고서 데카르트식으로 다시 생각해보자. 이성을 인간인가 아닌가를 판가름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삼을 때, ‘이성을 가지지 못한 어린 아이의 경우는 인간인가 아닌가'라는 문제가 다시 남는다.

이처럼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이노센스'는 인간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여기에 동서양 역사의 오랜 잠언들이 대사로 이어지고, 인간존재의 물음만큼이나 머리 아프게 한다.

그러나 오시이 마모루 감독이 던지는 질문에 답할 필요는 없다. 더더구나 연결고리를 찾기조차 힘든 잠언들로 인해 주눅들 필요는 더더욱 없다.

전작 '공각기동대'에서 이미 질문은 던져졌고, '이노센스'는 그것을 심화시키거나 확대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반복재생은 더욱더 화려해지고 현란해진 화면과 함께, 디지털 시대에 사랑방식을 전개한다.

“나의 네트에 접속하는 한, 나는 항상 네 곁에 있는 거야”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네트로 사라지는 여형사 쿠사나기처럼 어쩌면 가까운 미래의 사랑고백은 ‘접속’이라는 단어로 대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접속’하는 날은 ‘별이 빛나는 봄날의 밤’이었으면. 그날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바쁠지도 모른다.’

<김규형·포항지역사회연구소 사무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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