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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결과

'윤희정' 검색결과 (10000건)

5·18과 언론의 사명

2017년 1200만 관객을 사로잡았던 영화 ‘택시 운전사’. 이 영화는 한 평범한 택시 기사가 독일 기자를 태우고 광주로 향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총성과 비명이 가득한 1980년 5월 광주의 한복판에 홀로 남겨진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그는 목숨을 걸고 광주의 참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가 남긴 영상은 광주 민주항쟁을 세계에 알리는 결정적 증언이 되었고, 그의 업적은 한국 민주화에 큰 이정표가 되었다. 그가 취재한 영상이 전세계에 보도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도 신군부가 조작한 뉴스를 역사의 일부로 착각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역사적 진실은 누군가의 용기와 양심 그리고 사명감으로 인해 비로소 세상에 드러난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벌어진 일은 반민주적인 부당한 권력에 대항해 시민들이 온몸으로 저항한 역사였다. 하지만 당시 언론들은 진실을 보도하지 못했다. 신군부가 통제한 언론은 광주의 시민들을 북에서 온 폭도로 몰았고, 국가 폭력의 잔혹함은 철저히 가려졌다. 언론이 오히려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린 대표적인 사건이며 언론의 치욕스러운 역사적 오점으로 남아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언론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언론이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충분히 독립적이지 못했고, 때로는 진실보다 이해관계를 앞세웠다는 비판도 일리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론의 자리를 유튜버나 정치적 선동가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 자신과 비슷한 정치적 성향을 가진 유튜버의 말을 검증 없이 믿고, 그것을 사실처럼 받아들이는 작금의 유사 언론 현상은 일종의 주술적 신앙에 가까운 모습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의 역할은 불편한 사실을 취재하고, 서로 다른 의견을 검증하며, 권력이 감추려는 것을 끝까지 묻는 일이다. 그것이 언론의 존재 이유다. 언론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산업이 아니다. 사회가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무엇을 의심해야 하는지, 누구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묻는 공론장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래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은 입법, 사법, 행정에 이은 네 번째 권력기구라고 한다. 언론이 무너지면 시민들은 사실이 아니라 편향된 주관에 따라 판단하게 되고, 민주주의는 토론이 아니라 선동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 미디어 환경은 급변하고 있다. 소위 넷플릭스와 유튜브의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미디어의 형태가 달라졌다고 해서 언론의 책임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일수록 무엇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권력과 여론의 압력 속에서도 진실을 보도하는 언론의 역할은 더 중요하다. ‘언론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언론을 택하겠다’는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명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5·18 민주항쟁 46주년을 맞아 다시 묻는다. 오늘의 언론은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힌츠페터의 기자 정신 앞에 존재론적 질문을 반추해보아야 한다. 권력의 편이 아니라 시민의 편에 서는 것, 침묵이 강요되는 순간에도 진실을 말하는 것, 민주주의 사회를 지키는 책임을 다하는 것. 그것이 5월의 광주가 오늘의 언론에 요구하는 사명이다. /주재원 한동대 교수

2026-05-21

“작업실 바꿨더니 예술이 달라졌네”··· 대구-영천 청년작가들의 발칙한 ‘장소 교환’

“작업실을 떠난 작품들, 공간이 바뀌자 예술의 결도 달라졌다.” 대구와 경북 영천에서 실험적인 작품 활동을 펼쳐온 청년 작가들이 서로의 공간을 바꾸어 선보이는 특별한 ‘출장 전시’를 갖는다. 대구문화예술진흥원 문화예술본부 대구아트웨이와 영천시 직영 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는 오는 6월 4일부터 입주작가 교류전 ‘미술 출장: 서로의 공간으로’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작가와 작품이 기존의 작업 공간을 벗어나 타 지역으로 이동하는 ‘장소 교환’ 방식으로 기획됐다. 동일한 조건 아래 전시 공간만 바꿈으로써, 공간의 변화가 작품의 시각적·심리적 결에 어떤 변화를 주는지 조명하는 실험적 시도다. 전시는 두 기관의 공간을 맞교환해 독립된 섹션으로 진행된다. 대구아트웨이 입주작가 8팀은 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에서 6월 4일부터 7월 5일까지 전시를 열며, 영천예술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 8명은 대구아트웨이에서 같은 날 개막해 8월 24일까지 관람객을 만난다. 회화, 조각, 설치, 미디어아트 등 다채로운 장르로 구성된 이번 전시에는 총 16팀이 참여해 양 지역의 역동적인 예술 세계를 선보인다. 대구의 주요 참여작가인 이상헌은 한국현대조각초대전 대상 수상자로, 거친 목조 조형을 통해 인간 내면의 억압과 불안을 형상화한 ‘가위눌림’을 출품한다. 미디어아트 그룹 디라이트(배문경·서현규)는 금속과 3D 프린팅 조형에 디지털 기술을 결합해 미래적 감각으로 기억과 귀환의 서사를 풀어낸 동명의 작품 ‘디라이트’를 선보인다. 영천에서는 독일 칼스루에 국립예술대에서 수학한 이미지 작가가 강렬한 색채와 이질적 재료로 원초적 에너지를 분출하는 조각·퍼포먼스 작업 ‘흰색 말 두상’을 소개한다. 라유(장인영) 작가는 ‘내면의 투영2’는 투명하고 섬세한 유리 매체를 활용한 조형 작업을 통해 물질성과 감각의 관계를 밀도 있게 탐구한다. 단순한 작품 전시를 넘어 작가 간 지속 가능한 네트워크 형성에도 힘을 쏟는다. 양 기관은 전시 기간 중 입주작가 교류를 위한 라운드테이블을 운영해 향후 지역 간 공동 프로젝트로 이어질 수 있는 협업의 발판을 마련할 계획이다. 방성택 대구문화예술진흥원 문화예술본부장은 “이번 전시는 작업과 공간이 맺는 유기적 관계를 실험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라며 “두 지역 간 예술적 교류와 소통을 확장하는 지속적인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6-05-21

오래된 시간과 살아가다···아파트속의 사월동 지석표군

대구 수성구 사월동 일대에는 청동기시대의 흔적인 지석묘군이 남아 있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와 도로, 상가와 지하철역이 들어선 도심이지만, 오래전 이곳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아가던 생활 공간이었다. 사월동과 욱수동, 신매동 주변에서는 개발 과정에서 여러 기의 고인돌과 석관묘, 토기 조각 등이 발견됐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사월동 지석묘군은 도시 개발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용케 살아남은 시간의 흔적이다. 우리 아파트 안에도 그 고인돌 4기가 있다. 하지만 나는 이사 온 뒤 몇 년 동안 그 사실을 모르고 지냈다. 산책할 때면 늘 아파트 뒷문으로 나가 신매지를 돌거나 욱수천 산책길을 걸었다. 직장에 다니며 바쁘게 하루를 보내다 보면 대부분의 이동은 자동차 안에서 이뤄졌고, 단지 안을 천천히 걸어볼 일도 많지 않았다. 매일 지나치는 공간이면서도 나는 그곳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도서관 강좌에서 진행한 도심 유적 답사에 참여한 일이 있었다. 답사지 설명 속에서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을 때 조금 놀랐다. ‘사월동 지석묘군’이라는 그 유적이 바로 내가 사는 아파트 안에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답사 날, 사람들과 함께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 늘 지나던 길인데도 처음 보는 장소 같았다. 아파트 한편 작은 공간에 거대한 돌 하나와 규모가 작은 돌 세 개가 놓여 있었다. 보호 울타리와 안내판이 없었다면 그냥 오래된 조경석쯤으로 생각하고 지나쳤을 그 돌들이 수천 년 전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남긴 무덤이었다. 그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지석묘군 앞을 그저 무심히 지나쳤었다. 하지만 이제는 가끔 걸음을 멈추고 고인돌 앞에 서게 되는데, 그럴 때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동차 소리가 들리고, 택배 차량이 오가고,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곳에 선사시대의 시간이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밤이면 수백 개의 아파트 창문에 불이 켜지고 사람들은 휴대전화 화면을 내려다보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 곁에서 고인돌은 소리 없이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같은 방식으로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청동기시대 사람들도 가족과 함께 먹고살 궁리를 하며 계절을 견디고, 죽은 이를 기억하며 살아갔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 역시 더 편리한 집과 빠른 이동 수단 속에 살 뿐, 하루를 버티고 가족을 돌보며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시간의 속도일 것이다. 청동기시대의 돌은 수천 년을 견디며 남아 있는데, 우리는 너무 빠르게 지나치며 산다. 재건축 이야기가 오가고, 새 아파트와 더 높은 건물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동안에도 돌은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킨다. 새 도시를 세우기 위해 땅을 파면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오래된 과거라는 사실도 어쩌면 의미심장하다. 사월동 지석묘군은 거창한 유적지가 아니다. 관광객이 몰려오는 유명 문화재도 아니다. 그러나 그래서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가장 평범한 일상 속에서 가장 오래된 시간이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가끔 단지 안을 천천히 걷는다. 고인돌 앞을 지날 때면 늘 비슷한 생각이 든다. 우리는 과거 위에 사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시간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도시가 아무리 빠르게 변해도 어떤 시간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남긴 돌무덤 곁에서 오늘도 누군가는 장을 보고, 누군가는 퇴근하고, 누군가는 아이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온다. 수천 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도, 우리는 결국 같은 땅 위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인지도 모른다. 오늘 외출에서 돌아오다 지석묘군 앞에서 한참을 생각에 잠긴다. /손정희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6-05-20

다카이치 日 총리 사로잡은 '안동의 불꽃'···정부, 일본인 관광객 유치 전방위 시동

지난 19일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감탄을 자아냈던 안동 ‘선유줄불놀이’가 일본인 관광객을 한국으로 끌어모을 새로운 ‘K-관광’의 흥행카드로 등판한다. 정상회담으로 조성된 양국의 우호 분위기를 문화·관광 교류의 기폭제로 삼겠다는 정부의 포석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정상회담을 계기로 세계적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경북 안동의 문화·관광 콘텐츠를 일본 전역에 대대적으로 알리고, 방한 관광객 유치에 속도를 내기 위한 전방위 마케팅 전략을 20일 발표했다. 선유줄불놀이는 안동 하회마을 부용대 절벽 꼭대기에서 낙동강을 가로질러 밧줄을 매단 뒤, 수백 개의 숯불 주머니를 매달아 불을 붙이는 한국 고유의 전통 불꽃놀이다. 밤하늘을 수놓으며 사방으로 흩날리는 불씨와 그것이 어두운 강물 위에 반사되는 장관은 전통 ‘선유 문화’와 낙동강의 자연 절경이 결합한 한국 전통 미학의 정수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번 정상회담 당시 외신들의 이목이 집중된 배경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정부는 다카이치 총리의 방한 동선을 그대로 체험할 수 있는 ‘안동 선유줄불놀이’ 특별 관광 상품을 이달 말부터 일본 현지에 전격 선보인다. 일본의 HIS, 한큐교통사, 요미우리여행 등 대형 여행사를 통해 판매되는 이 상품은 오는 10월 3일과 17일에 열리는 선유줄불놀이 행사를 핵심 콘텐츠로 구성했다. 여기에 경남 함안 낙화놀이, 진주 남강유등축제를 연계해 3박 4일간 한국의 ‘전통 빛’을 만끽하는 명품 투어 동선으로 완성도를 높였다. 단순한 관람을 넘어 오감을 만족시키는 체험 상품도 대폭 강화된다. 특히 정상회담 만찬 테이블에 올라 화제를 모았던 조선시대 전통 닭조림 요리 ‘전계아(煎鷄兒)’에 주목했다. 오늘날 안동찜닭의 원형인 전계아 등 지역 별미를 활용한 미식 상품과 하회마을 전통 한옥 숙박을 연계한 문화 테마 상품이 본격적으로 확대되는 것. 문체부는 상품의 신뢰도와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오는 6월 중 일본 주요 여행사 관계자들을 대거 초청하는 사전답사 여행(팸투어)을 실시할 예정이다. 일본 현지인을 겨냥한 미디어 공략도 촘촘하게 전개된다. 5월 말 아사히신문을 시작으로 6월 중 니시니혼신문에 안동의 매력을 조명하는 특집기사와 대대적인 모객 광고가 실린다. 이와 함께 TV아사히, TBS 등 일본 대표 방송사의 인기 프로그램을 통해 안동의 수려한 풍경과 다채로운 즐길 거리를 현지 안방에 생생하게 전달할 계획이다. 트렌드에 민감한 일본 MZ세대를 겨냥한 온라인 마케팅도 불을 뿜는다. 6월부터 라쿠텐트래블, 익스피디아 등 대형 온라인 여행사(OTA)와 협업해 대구공항 항공편을 연계한 안동 여행 판촉전을 대대적으로 진행한다.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에서는 현지 유명 인플루언서들이 참여한 감성 홍보영상이 전면에 나선다. 오는 10월에는 일본 인기 연예인 마츠오카 미츠루가 동참하는 ‘대구·안동 의료웰니스 이야기쇼’를 개최해 현지 흥행의 정점을 찍겠다는 구상이다. 최휘영 문체부 장관은 “이번 한·일 정상회담은 안동 고유의 전통문화와 미식, 한옥의 매력을 일본 시장에 깊이 각인시킬 절호의 기회”라며 “양국 정상의 발자취를 직접 체험하는 차별화된 특별상품과 공격적인 현지 마케팅을 통해 안동이 일본인들에게 사랑받는 새로운 필수 관광지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총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6-05-20

가정의 달, 온 가족이 꼭 봐야 할 단 하나의 뮤지컬···백희나의 ‘달 샤베트’ 포항 찾아온다

가정의 달을 맞아 온 가족이 함께 따뜻한 감동을 나눌 수 있는 가족 뮤지컬 한 편을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 수상 작가 백희나의 베스트셀러 그림책 ‘달 샤베트’가 포항 관객을 찾아온다. 포항문화재단(대표이사 이상모)은 연례 공연 시리즈인 ‘키즈페스타 인 포항’의 일환으로 오는 6월 5일과 6일 양일간 포항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어린이 가족 뮤지컬 ‘달 샤베트’를 선보인다. 원작인 백희나 작가의 그림책은 인형과 소품, 배경을 직접 제작해 촬영하는 독창적인 작업 방식으로 큰 사랑을 받아왔다. 이번 무대 역시 이러한 원작 특유의 아기자기하고 따뜻한 감성을 입체적인 무대 장치와 영상, 조명을 활용해 환상적으로 구현해낸 것이 특징이다. 작품은 무더운 여름밤 뜨거운 열기에 녹아내린 달로 ‘달 샤베트’를 만들며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다. 에어컨과 선풍기에 의지한 채 소통이 단절됐던 아파트 주민들이 반장 할머니가 나눠준 시원한 달 샤베트를 함께 베어 물며 서로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냈다. 어린이 공연에서는 보기 드문 섬세한 세트와 감각적인 연출로 아이들에게는 무한한 상상력을, 부모 세대에게는 깊은 울림과 동심을 선사할 것으로 보인다. 공연과 연계한 다채로운 프로그램도 눈길을 끈다. 6월 5일 오전 11시 공연 예매자들에게는 특별한 기회가 주어진다. 공연이 끝난 뒤 무대 뒤 공간을 직접 둘러보고 장치들을 가까이서 체험할 수 있는 ‘백스테이지 투어’가 진행돼 어린이 관객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할 예정이다. 또한 공연 기간 동안 공연장 로비에는 현충일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작은 안내 공간이 마련된다. 다가오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어린이들이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도록 배려했다. 박은숙 포항문화재단 사무국장은 “이번 공연은 무대와 영상이 어우러진 환상적인 연출을 통해 온 가족이 함께 공감하고 즐길 수 있는 작품”이라며 “아이들에게는 특별한 추억을, 부모들에게는 따뜻한 감성을 전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티켓 가격은 R석 4만 원, S석 3만5000원, A석 3만 원이며, 오는 5월 25일까지 예매할 경우 40%의 조기예매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예매는 티켓링크에서 가능하며, 자세한 정보는 포항문화포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6-05-20

경북산업비즈니스벨트 조성을 제안하다(상)

대한민국 제조업의 중심지였던 경북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통계 자료가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제조업 비중, 즉 전국 제조업에서 경북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5년 12.5%를 정점으로 2010년 11.1%, 2016년 9.8%, 2022년 7.79%로 계속 하락하고 있다. 주력산업의 국내외 이전, 판교·용인 등 수도권으로의 신산업 집중화가 주요 원인이다. 이는 단순한 경기 변동이 아니라, 경북 제조업이 외부 환경 변화에 취약한 구조적·추세적 문제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존 방식의 산업정책을 넘어서는 새로운 성장전략을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 해법으로 나는 경북산업비즈니스벨트 조성을 제안한다. 기존의 산업벨트가 산업단지와 도로망을 물리적으로 연결하는 방식에 머물렀다면, 경북산업비즈니스벨트는 산업단지, 비즈니스 기능, 교통망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광역 산업혁신 전략이다. 이를 통해 기존 산업의 생산성을 높이고, 고부가가치 신산업을 창출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경북산업비즈니스벨트는 도시별 생산 기능과 연구개발 기능을 연계하고, 사업화·금융·데이터 플랫폼 등 비즈니스 기능을 융합하며, 도시 간 물류와 인적 교류를 순환 교통망으로 연결하는 전국 최초의 경북형 광역 산업혁신 생태계다. 경북산업비즈니스벨트가 필요한 첫 번째 이유는 산업 이동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다. 산업은 속성상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 마치 철새가 먹이를 찾아 이동하듯, 산업도 기술, 시장, 인재, 비용, 이윤을 따라 이동한다. 제조업과 함께 성장했던 도시가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면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미국 피츠버그가 대표적인 사례다. 한때 피츠버그는 미국 산업화의 심장이었고, 철강은 도시 번영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글로벌 산업구조 변화 속에서 철강산업의 중심은 일본으로, 다시 한국과 중국으로 이동했다. 제조 기반이 흔들리면서 피츠버그는 한때 미국에서 쇠락한 공업도시의 상징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피츠버그는 과거의 영광에 머물지 않았다. 과감한 산업 전환에 나섰다. 카네기멜론대학과 지역 연구기관을 중심으로 컴퓨터, 로봇, 바이오, 첨단 의료산업을 육성했고, 연구개발과 창업 중심 도시로 체질을 바꾸었다. 특히 중요한 점은 피츠버그의 전환이 도시 하나의 노력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펜실베이니아 주정부는 피츠버그를 제조업 부활과 신산업 전환의 핵심 거점으로 설정하고, 주변 도시와 생산, 물류, 소재, 에너지 기능을 연계하는 분업형 광역경제권 전략을 추진했다. 산업 르네상스를 위해 도시 하나가 아니라 주 전체를 하나의 산업 생태계로 재구성한 것이다. 그 결과 피츠버그는 연구개발, 로봇, 의료, 교육, 창업이 결합된 혁신도시로 바뀌었다.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이 G20 정상회의 개최지로 피츠버그를 선택한 것도 이러한 도시 전환의 상징적 장면이었다. 새로운 전략과 이를 실행하는 정치적 능력이 도시의 운명을 바꾼 것이다. /심학봉 전 국회의원

2026-05-19

얕은 침잠(沈潛)의 변명

식탁의 중심에서 휴대용 가스버너가 나직한 숨을 내뿜는다. 그 위로 얹힌 들큼한 육수가 투명한 수증기를 피워 올리며 보글보글 끓기 시작할 때, 나는 집게를 들어 얇게 저민 선홍빛 소고기 한 점을 집어 뜨거운 물결 속에 고기를 밀어 넣는다. 그 머무름은 찰나에 불과하다. 고기가 뜨거운 수마(水魔)에 닿아 제 빛깔을 채 잃기도 전에, 서둘러 핏기만 가신 채 건져 올린다. 샤브샤브의 미덕은 바로 ‘얕음’과 ‘신속함’에 있다. 깊이 잠기지 않을 것, 그리하여 본연의 연한 질감을 잃지 않을 것. 문득 그 찰나를 바라보며 나는 내 삶의 어떤 단면들을 냄비 속의 고기처럼 대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기시감에 사로잡힌다. 인생의 중턱을 넘어 갱년기라는 정체 모를 불청객을 맞이한 이후, 나의 일상은 육체의 무게를 덜어내기 위한 지리한 투쟁으로 점철되어 왔다. 거울 앞에 설 때마다 낯설게 차오른 살들은 세월의 흔적이자 대사가 느려진 장기들이 보내는 무언의 경고였다. 의사는 담담하게 운동을 권했고 나는 비장한 각오로 운동화 끈을 묶었다. 그러나 그 비장함의 유통기한은 언제나 샤브샤브 고기가 끓는 육수에 머무는 시간만큼이나 짧고 덧없었다. 스스로를 돌아보건대, 나는 결코 인내심이 결여된 인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타인들이 보기에는 미련할 정도로 하나의 우물을 파는 고지식한 고집이 있었다. 글을 쓰기 위해 며칠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원고지 위에서 단어들과 사투를 벌일 때도,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두꺼운 문학 텍스트를 수십 번씩 고쳐 읽으며 행간의 의미를 채굴할 때도, 나는 언제나 끈질긴 추적자였다. 무언가를 사유하고 창작하는 영역에서 나의 정신은 늘 사골을 고는 가마솥의 불꽃처럼 은근하고도 집요하게 타올랐다. 몇 시간이고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텍스트의 뼈대를 고아내고, 사유의 진액을 우려내는 일에는 추호의 주저함도 없었던 내가 어찌하여 이 사소한 육체의 움직임 앞에서는 이토록 유약하게 무너지는 것일까. 흔히 우직하고 지속적인 노력을 상징할 때 우리는 ‘사골을 우린다’는 표현을 쓴다. 내가 삶을 대했던 태도는 사골과 가까웠다. 문장을 다듬고, 삶의 비극을 응시하며, 내면의 고통을 짓이겨 하나의 수필로 길어 올리는 과정은 온전히 내 안의 진액을 짜내는 고단한 은거(隱居)였다. 그러나 운동이라는 물리적 영역에 들어서는 순간 나의 서사는 여지없이 샤브샤브의 가벼운 궤적으로 선회해 버렸다. 헬스장의 러닝머신 위에 올라서거나 발레 슈즈를 신고 선을 그릴 때, 내 육체는 그 시공간에 깊숙이 착지하지 못하고 겉돈다. 마치 뜨거운 육수가 무서워 슬쩍 발만 담갔다가 빼내는 얇은 고기 조각처럼, 땀방울이 이마에 맺히기도 전에 시계를 확인하고, 근육이 팽팽한 긴장을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 서둘러 동작을 마무리한다. 진득하게 육체를 단련하는 사골의 시간 대신 서둘러 건져 올리는 샤브의 순간만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 현격한 괴리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갱년기에 접어든 육체는, 호르몬의 썰물과 함께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흘러가는 거대한 자연의 섭리다. 아무리 노력해도 예전 같지 않은 기초대사량, 조금만 움직여도 삐걱거리는 관절의 비명은 나로 하여금 내 몸을 온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선사했다. 어쩌면 나는 진득하게 운동을 지속했다가도 결국 가시적인 성과를 보지 못할까 두려워, 처음부터 깊이 잠기지 않는 샤브샤브식 ‘얕은 운동’ 속으로 도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성실한 실패자가 되기보다는, 성의 없는 방관자가 되는 편이 내 자존심을 지키기에 유용했을 터이다. 운동을 진득하게 하지 못하고 겉도는 내 모습이 비록 다이어트라는 세속적 목표에는 불성실해 보일지라도 그것은 내 무의식이 선택한 생존의 방식일 수 있다. 이제는 육체든 정신이든, 지나치게 깊이 침잠하여 스스로를 혹사시키지 말라는 내면의 브레이크. 매일 거창한 성과를 내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대신, 그저 삶이라는 뜨거운 육수에 가볍게 몸을 적셨다 나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 얕은 접촉만으로도 생은 지속될 수 있다고 위로하는 몸의 언어 말이다. 글을 쓰는 일과 아이들을 마주하는 일에는 여전히 사골 같은 집념을 발휘하겠지만, 내 지친 육체를 달래는 일만큼은 이 샤브샤브의 유연함을 허락하기로 한다. 살을 빼고 건강을 되찾는 일 또한 맹렬한 투쟁이 아니라 세월의 흐름에 부드럽게 순응하며 핏기만 살짝 가시듯 가볍게 외연을 다듬어가는 과정이어야 마땅하기에 말이다. /김경아 작가

2026-05-19

부처님 오신 날, 옛 책 표지에 새겨진 ‘卍(만)’의 뜻을 읽다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 역설적이게도 우리 옛 고서 표지의 70% 이상은 불교의 상징인 ‘卍(만)자문’으로 장식돼 있었다. 억불의 시대 속에서도 책을 보호하려는 실용적 지혜와 고려시대부터 이어진 전통 미감은 종교적 장벽을 넘어 명맥을 유지해 온 것이다.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은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옛 책 표지를 장식하던 능화판 가운데 ‘卍자문’이 지닌 의미를 조명하고, 조선시대 책문화에 남아 있는 불교적 상징과 전통 미감을 소개했다. 능화판은 책 표지에 문양을 찍어내기 위해 사용한 목판으로, 조선시대 전적(典籍)의 장정(裝幀·책을 꾸미고 묶는 방식) 문화에서 실용성과 심미성을 함께 보여주는 도구다. 책 표지에 새겨진 전통의 무늬, 능화판능화판으로 찍어낸 표지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능화표지는 표지에 아름다움을 더하는 동시에 책을 습기와 충해로부터 보호하는 기능도 함께 지녔다. 문헌 기록에 따르면 능화표지 제작에는 황염(黃染), 곧 노랗게 물들인 종이, 배접지, 교말, 밀랍, 능화판 등이 사용됐으며, 밀랍은 문양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광택과 방습 효과를 더했다. 염색에 쓰인 황벽(黃蘗)과 치자(梔子)는 방충·항균 성분을 지녀 책의 보존성을 높여줬다. 이러한 점에서 능화표지는 조선시대 책문화가 보여주는 실용성과 심미성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책문화 속에서 널리 쓰인 卍자문책 표지에 나타나는 다양한 문양 가운데서도 卍자문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조선 초기에는 연보상화문과 연화문이 많고 귀갑문이 바탕문으로 주로 쓰였으나, 조선 중기에 이르면 卍자문이 널리 사용됐고, 조선 말기에는 대부분 卍자문이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서 1200여 권의 능화표지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卍자문은 전체 문양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卍자문이 일시적 유행을 넘어 조선 후기에 매우 익숙하고 선호된 책 표지 문양이었음을 보여준다. ‘주역천견록’과 ‘동의보감’ 등의 표지에서도 연속 배열의 卍자문이 확인되는데, 이는 이 문양이 불서에만 국한되지 않고 의서·유서·근대 전적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쓰였음을 증명한다. 조선시대 책 표지에 卍자문이 지속적으로 쓰인 배경은 능화표지의 연원과 무관하지 않다. 능화표지는 고려시대 사경(寫經)과 불전(佛典)의 표지 장식 전통과 연결되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경전을 장엄하던 감각이 일반 전적의 표지를 꾸미는 방식으로도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본래 卍자는 산스크리트어로 스바스티카(svastika)라 하며, 불교에서는 상서롭고 길한 뜻을 지닌 상징이자 부처의 경지를 나타내는 불심인(佛心印)으로 이해돼 왔다. 조선이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았다고 하더라도 생활문화와 공예, 장정 관행까지 불교적 요소를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卍자문은 오랜 시간 불교 상징으로 쓰이면서도 점차 길상성과 장엄성을 지닌 장식 문양으로 폭넓게 수용됐고, 반복 배열이 쉬운 기하학적 특성까지 더해져 책 표지 문양으로 지속적으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卍자문은 단순한 종교 표식을 넘어,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도 전통과 미감, 실용성이 함께 작동하며 계승된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국학진흥원 미래전략실 한승일 연구위원은 “능화판의 문양은 책 표지를 꾸미는 장식을 넘어, 당시 사람들의 가치관과 미감, 그리고 책을 대하는 태도를 담고 있다”라며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소개하는 卍자문 능화판은 우리 전통문화에 남아 있는 불교적 상징의 한 사례이자, 조선시대 책문화의 깊이와 품격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밝혔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6-05-19

“500년 전 ‘전통 닭조림’ 전계아, 한일 외교 테이블에 오른 이유

달궈진 기름에 어린 닭고기가 노릇하게 익어간다. 고추가 한반도에 전래되기 전 간장과 참기름의 고소함에 식초와 초피가루의 찌릿한 향이 덧입혀진다. 이 정갈하고 담백한 ‘500년 전의 맛’이 한일 외교 테이블을 장식한다. 19일 안동에서 개최되는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 만찬을 빛낼 주메뉴로 조선시대 전통 영계 조림인 ‘전계아(煎鷄兒)’가 낙점됐다. 외국 정상과의 공식 만찬에서 조선시대 고조리서인 ‘수운잡방(需雲雜方)’에 등장하는 요리를 대표 주메뉴로 전면에 내세운 것은 역대 정부 통틀어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만찬의 주인공인 전계아는 보물 제2134호로 지정된 안동 종가의 이 고조리서에 기록된 닭 조림 요리다. 조선 전기인 1500년대 초반에 집대성된 이 책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조선시대 한문 조리서다. 여기에는 ‘손님을 정성껏 대접한다’는 안동 명문가의 ‘접빈객(接賓客)’ 정신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특히 이 요리는 고추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의 전통 조리법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에 자극적인 매운맛이 전혀 없다. 매운 음식에 서툰 일본 총리의 입맛을 세심하게 배려하면서도, 담백하고 정갈한 ‘한식의 원형’을 보여주겠다는 대통령실과 안동시의 외교적 연출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번 만찬은 락고재 ‘수운잡방 헤리티지 다이닝’의 김도은 종부(광산 김씨 설월당 15대 종부)와 국빈 행사 경험이 풍부한 웨스틴 조선호텔의 협업으로 진행된다. 전통의 깊은 맛에 현대적인 최고급 조리 기술을 접목해 격조 높은 퓨전 한식 코스 요리를 선보일 예정이다. 만찬의 포문을 열 전계아는 기름을 달궈 어린 닭고기를 익힌 뒤 간장과 참기름을 넣고 볶다가 식초와 초피가루로 바짝 졸여내는 요리다. 튀김옷 없이 기름에 지지듯 볶아내어 정갈한 맛이 일품이다. 이어지는 메인 요리로는 육질이 부드러운 최고급 ‘안동한우 갈비구이’와 함께 화합과 소통을 상징하는 따뜻한 ‘해물 신선로’가 상에 올라 만찬의 정점을 찍는다. 디저트로는 한국 전통 디저트인 전약과 일본 전통 디저트인 모찌를 한 접시에 함께 담아낸다. 달콤한 마무리를 선사하는 디저트 한 접시에도 양국이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나아가길 바라는 연대의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박정남 안동종가음식연구소 원장은 “‘수운잡방’ 외교가 한일 관계 개선의 신호탄이 됨과 동시에 안동이 가진 독보적인 문화적 자산과 브랜드 가치를 세계에 알리는 최고의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6-05-18

“이재명-다카이치 녹일 ‘전계아’···고추 전래 전 ‘한식 원형’으로 외교 펼친다

달궈진 기름에 어린 닭고기가 노릇하게 익어간다. 고추가 한반도에 전래되기 전 간장과 참기름의 고소함에 식초와 초피가루의 찌릿한 향이 덧입혀진다. 이 정갈하고 담백한 ‘500년 전의 맛’이 한일 외교 테이블을 장식한다. 19일 안동에서 개최되는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 만찬을 빛낼 주메뉴로 조선시대 전통 영계 조림인 ‘전계아(煎鷄兒)’가 낙점됐다. 외국 정상과의 공식 만찬에서 조선시대 고조리서인 ‘수운잡방(需雲雜方)’에 등장하는 요리를 대표 주메뉴로 전면에 내세운 것은 역대 정부 통틀어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만찬의 주인공인 전계아는 보물 제2134호로 지정된 안동 종가의 이 고조리서에 기록된 닭 조림 요리다. 조선 전기인 1500년대 초반에 집대성된 이 책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조선시대 한문 조리서다. 여기에는 ‘손님을 정성껏 대접한다’는 안동 명문가의 ‘접빈객(接賓客)’ 정신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특히 이 요리는 고추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의 전통 조리법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에 자극적인 매운맛이 전혀 없다. 매운 음식에 서툰 일본 총리의 입맛을 세심하게 배려하면서도, 담백하고 정갈한 ‘한식의 원형’을 보여주겠다는 청와대와 안동시의 외교적 연출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번 만찬은 락고재 ‘수운잡방 헤리티지 다이닝’의 김도은 종부(광산 김씨 설월당 15대 종부)와 국빈 행사 경험이 풍부한 웨스틴 조선호텔의 협업으로 진행된다. 전통의 깊은 맛에 현대적인 최고급 조리 기술을 접목해 격조 높은 퓨전 한식 코스 요리를 선보일 예정이다. 만찬의 포문을 열 전계아는 기름을 달궈 어린 닭고기를 익힌 뒤 간장과 참기름을 넣고 볶다가 식초와 초피가루로 바짝 졸여내는 요리다. 튀김옷 없이 기름에 지지듯 볶아내어 정갈한 맛이 일품이다. 이어지는 메인 요리로는 육질이 부드러운 최고급 ‘안동한우 갈비구이’와 함께 화합과 소통을 상징하는 따뜻한 ‘해물 신선로’가 상에 올라 만찬의 정점을 찍는다. 디저트로는 한국 전통 디저트인 전약과 일본 전통 디저트인 모찌를 한 접시에 함께 담아낸다. 달콤한 마무리를 선사하는 디저트 한 접시에도 양국이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나아가길 바라는 연대의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박정남 안동종가음식연구소 원장은 “‘수운잡방’ 외교가 한일 관계 개선의 신호탄이 됨과 동시에 안동이 가진 독보적인 문화적 자산과 브랜드 가치를 세계에 알리는 최고의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6-05-18

인생은 같다

삶이란 무엇인가를 자꾸 생각하게 된다. 누구나 인생의 길은 같다. 어지간히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같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한다. 어머니가 많이 아프시면서 정신없었다. 대전과 서울을 얼마나 많이 오갔는지 모른다. 체력에 한계가 느껴지고, ‘처방’, 대처방법을 다르게 생각하는 동생들과도 이야기를 많이 해야 했다. 나도 어렸을 때 내가 누군지 생각하고 살았던가. ‘나’라는 관념 없이 그냥 먹고 살고 울고 보채지 않았던가. 나이 들어 ‘자기 자신’을 잊어간다는 것, 잃어버린다는 것이 아주 이상한 일이라고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생각하며 위안을 얻으려 했다. 어느 날 대전 집 안방에 모신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무심코 들여다 보니, 액자 속의 아버지는 얼굴에서 힘이란 힘은 다 빼고 찍으신 듯한 모습이셨다. 돌아가실 때보다 많이 젊으실 적 사진을 선택했는데, 그때는 기운도 좋으셨을 텐데, 얼굴에서 힘이 느껴지지 않으셨다. 동화에 얽힌 노래 만드는 AI 작업을 하느라 유튜브를 부지전히 들락거렸다. 새로 채널을 만들고 수노(SUNO)가 작곡한 ‘늑구’ 노래 영상을 올리다 보니, 알고리즘 때문인지 옛날 노래 영상이 보이고 그 밑에 댓글이 하나 눈에 띄었다. 그 노래를 들으니 돌아가신 아버지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진다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버지가 마지막 아프실 때가 그래도 좋았었다.’ 처음에 칠십 대 중반에 대장암과 신장암을 함께 앓으시고 신장을 하나 떼어내시고 독한 항암 치료를 체육인의 의지로 이겨내셨다. 연세가 아흔에 이르렀을 때 다시 두 개의 암이 찾아왔다. 하나는 대장암, 또 하나는 요관암이었다. 의사 말대로라면 다발성이요, 전이된 것은 아니라 했는데, 그렇게 아버지는 암으로 ‘4관왕’이 되신 것이었다. 함께 척추골절까지 앓으셔서 일어나지 못하시고 ‘자리보전’하시는 것을, 어머니가 다 보살피시느라 고생이 많으셨다. 그래도 두 분이 함께 계시니 그것이 좋은 것이었다. 1년 2개월 아프시는 중에 대전을 무척이나 오갔지만 어깨에 짐을 짊어진 것 같은 느낌은 없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혼자 되시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짐은 온전히 어머니에게서 자식들에게로, 내게로 옮겨졌다. 이번 토요일, 일요일은 더 어려웠다. 요양보호사가 주말이면 쉬시는데, 마침 이틀 연속으로 학생들과 답사 수업을 해야 했고, 주중에 하지 못한 수업 보강도 줌으로 해야 했다. 나 한 몸으로 커버할 수 없어 식구들이 전부 ‘동원’된 이틀. 지쳐 잠들었다 스르륵 깨었다. 추천서 일곱 통 중에 마저 두 통을 다 쓰니 세상은 정적 그 자체다. 어지간히 시끄럽게 울어대는 앵무새 빠삐용과 베카도 어딘가로 숨어 소리를 죽였다. 산 바로 턱밑 아파트의 한밤은 자동차 소리조차 멎었다. 긴 정적 틈으로 멀리 차 한 대가 지나가는 소리 울린다. 인생의 길은 누구나 같다. 이제 보이는 것 같다.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제외하면 누구나 같은 길을 가는 것이라는 ‘진리’. 누구나 다 그렇게 가는 것이므로 두려울 것도 없다. 나만의 고독일 때 무서운 것이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6-05-18

공봉학의 인문학 이야기..서양 철학은 붓다의 각주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라는 말이 있다. 플라톤(고대 그리스철학자·기원전 428년~348년)은 소위 ‘이데아론’으로 유명하다. ‘감각세계 뒤에는 영원하고 완전한 본질이 존재 한다’라는 것이다. 세계는 이데아를 복사한 것에 불과하며, 이데아에 충실한 복사본일수록 그 가치가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 순위를 나열하자면, 최고는 이데아, 다음은 이데아를 복사한 복사본, 다음은 복사본의 복사본 순서이다. 이를 영어로 표현하면 Idea-Copy-Copy of Copy이다. 이데아가 ‘체리 따봉’이다. 이데아와 멀어질수록 그 가치는 떨어진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복사본의 복사본은 단순한 복사본조차도 흐리멍텅하게 만드는 거의 쓰레기 수준의 그 무엇인 셈이다. 플라톤은, ‘시를 쓰는 시인은 복사본의 복사본의 역할을 하는 자’이므로 없어져야 할 존재라고 주장했다. 여기에 대하여 반기를 든 철학자가 있다. 플라톤에 있어 가장 비천한 것인 최후의 복사본은 복사본이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진짜라고 주장하는 들뢰즈(프랑스 철학자·1925년~1995년)가 그다. 들뢰즈는 플라톤을 비판하는 것에 평생을 바쳤다고 해고 과언이 아니다. 최후의 복사본은 영어로는 simulacrum, 불어로는 simulacre(시뮬라크르)이다. 들뢰즈의 철학적 핵심 개념인 최후의 복사본인 ‘시뮬라크르’라는 불어식 발음이 일반적이다. 플라톤에게 노비 신분 취급을 받던 시뮬라크르는 들뢰즈에 이르러 왕으로 신분이 상승된다. 들뢰즈는 복사본의 전제로서의 원본인 이데아를 부정한다. 플라톤이 주장하는 복사본은 스스로 생성된 것일 뿐, 원본으로부터의 복사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들뢰즈에게 플라톤의 시뮬라크르는 원본에서 복사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르게 생성되는 것으로 ‘차이’를 본질로 한다. 원본의 부정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중세 교부철학의 밑거름이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플라톤 철학이 기독교화된 것이다. 이데아론은 진리 체계와 현상계를 나누어 서열화함으로써, 이데아와 복사본들에 대한 ‘권력의 서열화’를 초래하였다. 이데아를 장악한 자들은 권력의 정점에서 온갖 영화를 누린다. 진리 체계가 서열화되어 있으므로, 그 체계 사이에는 억압과 폭력의 개입은 당연하다. 들뢰즈는 플라톤의 타락한 가짜 시뮬라크르를 복권하여 새로운 차이를 생성하는 존재로 파악하므로써 권력의 서열화와 서열화된 권력 간의 폭력을 비판하였다. 지중해 연안에서 플라톤이 이데아를 외치고 있을 때, 동양의 인도에서는 모든 것은 변하며, 고정된 실체는 없다고 선언한 자가 있었다. 그가 붓다이다. 그는 이 세상이 아닌 저 세계에 원본 같은 불변의 그 무엇은 존재 하지 않으며, 우주를 주재하는 신 브라흐마의 속성인 아트만은 없다고 선언하였다. 세계는 원본에서 복사된 그 무엇이 아니라,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을 뿐이라는 연기론을 주장하였다. 절대를 부정하고, 오직 현실이 실재이며, 나머지(이데아조차도)는 모두 환·망·공·상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들뢰즈와 붓다의 교설이 일치하지는 않지만, 들뢰즈가 붓다를 읽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붓다를 웃긴 남자 플라톤. 그의 철학이야말로 붓다의 각주일지도 모른다. /공봉학 변호사

2026-05-18

초고령사회와 부모 돌봄

지금 우리는 초고령사회를 살고 있다. 언제 어디를 가도 60세 이상인 사람을 만나는 건 어렵지 않다. 2024년 12월, 초고령사회(65세 이상 비율이 20% 이상인 사회)가 되면서 가장 우려되는 건 돌봄에 관한 문제다. 길을 가다가 만나는 간판들을 보면 노인돌봄기관이 자주 눈에 띈다. 도로 위에서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차량보다 노인주간보호센터라고 적힌 노란 차에 타고 내리는 어르신들을 볼 때가 더 많다. 이제는 동네 깊숙한 곳에서도 만난다. 시민기자가 살고 있는 동네도 아파트 단지 안 가정어린이집은 없어진 지 오래고 제법 큰 규모의 어린이집도 어느 날 갑자기 노인돌봄센터로 간판을 바꾸었다. 이런 사례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지인들이 하는 이야기 중에는 부모님 돌봄에 관한 이야기가 요즘 주식 이야기만큼이나 자연스럽다. 얼마 전에는 한 독서회 회원이 올해 87세가 된 시어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신 이야기, 100세가 된 부모님을 일흔이 넘은 딸이 집에서 모시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육아의 어려움을 말한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부모 돌봄 대화가 많아지고 있는 나이가 되었다. 이야기 중에는 부모 돌봄에 대한 정보를 얻을 곳이 거의 없다는 사실과 마주했다. 육아의 어려움은 지역 온라인 맘카페에서 쉽게 얻을 수 있지만 부모 돌봄은 어려움을 혼자서 감당해야 해서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로 힘들 때가 많다고 했다. 지인들의 이야기에서 돌봄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초고령사회를 살면서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지만 지금 가까이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남편과 형제들은 수년째 시어머니를 돌보고 있다. 올해 아흔두 살인 시어머니의 아침, 저녁 식사를 자식들이 서로 돌아가면서 챙긴다. 낮에는 요양보호사의 돌봄을 받고 있다. 노인돌봄기관에 다니다 그만하시고 집에서 지내기를 바라셨다. 돌봄은 자식들의 몫으로 돌아왔다. 일곱이나 되는 자식들이 그나마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돌봄을 하고 있다. 시어머니는 아주 가벼운 치매가 있기는 하지만 일상생활을 하는 데 큰 무리는 없으시다. 가끔 찾아뵙지만 아직은 큰 힘이 필요하지는 않아서 자주 가는 남편에게 상황을 물어보는 정도다. 아무래도 남편은 시어머니 돌봄이 신경이 쓰이는 눈치다. 지난해 한국리서치의 ‘돌봄에 대한 국민 의식’ 조사에 따르면 돌봄과 간병의 부담은 모든 연령층에서 70% 이상이었다. 자식들은 부모 돌봄에 대해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다고 응답했다. 돌봄을 전적으로 담당해야 할 경우에는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 부모를 전문시설에 모실 경우는 직접 모시지 못한다는 죄책감도 77%로 나타났다. 하지만 가족이 경제와 일상생활을 포기하는 것보다 전문 기관에 모시는 게 옳다는 선택이 2% 더 높았다. 부모 돌봄을 하면서 자신이 노인이 됐을 때 생기는 돌봄 문제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느낀다고 했다. 응답자의 84%는 거동이 불편해지는 미래에 자신이 가족에게 짐이 될까 걱정했다. 또 조사에서 3명 중 2명이 자식이나 배우자로부터 돌봄을 받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답을 내놓았다. 초고령사회를 살고 있는 지금 돌봄은 누구나 피해 갈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내가 살던 곳에서 돌봄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기념일 빽빽한 가정의 달 5월, 부모와 자식, 돌봄에 대해 생각해 본다. /허명화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6-05-18

[부처님오신날 인터뷰]“천년고찰 보경사, 지친 마음 쉬어가는 안식처 되길”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참뜻은 고통받는 중생에게 스스로가 본래 부처임을 깨닫게 하는 데 있습니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정신적 빈곤과 번뇌에 갇혀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한 생각을 돌려 마음의 평안을 찾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진정한 포교이자 불교가 해야 할 역할입니다.” 경북 포항 내연산 자락에 자리 잡은 대한불교조계종 천년고찰 보경사(寶鏡寺)가 최근 ‘역동적인 힐링 도량’으로 새롭게 탈바꿈하며 주목받고 있다. 지난 2021년 주지로 부임한 이후 종교의 문턱을 과감히 낮추고 대중과 끊임없이 소통해 온 탄원 주지 스님은 다가오는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불교가 현대 사회에서 나아가야 할 길을 ‘문화’와 ‘휴식’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에서 찾았다. 1400년의 깊은 고요를 깨고 대중의 삶 속으로 깊숙이 걸어 들어온 탄원 스님을 만나 보경사의 변화와 우리 시대에 필요한 마음가짐에 대해 들어봤다. ◇ “종교는 인연 따라 편히 쉬어가는 곳”··· 문턱 낮춘 천년고찰 탄원 스님은 불교가 가진 가장 큰 미덕 중 하나로 ‘강요하지 않는 것’을 꼽는다. 종교라는 명목 하에 무언가를 억지로 주입하려 하기보다는, 누구나 언제든 찾아와 편안하게 머물다 갈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철학이다. 스님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우리 사회는 심리적으로 거대한 고립과 지침을 겪었다”며 “이러한 시기에 사찰이 해야 할 일은 거창한 교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찾아와 그저 편히 쉬어갈 수 있도록 아늑한 품을 내어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스님의 신념에 따라 보경사는 최근 몇 년간 눈에 띄게 대중 친화적인 환경으로 변모했다. 지난해에는 경내에 현대적이면서도 고즈넉한 멋을 살린 찻집을 새롭게 조성해 신도뿐만 아니라 등산객과 관광객들이 자연스럽게 머물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사찰을 둘러싼 내연산의 아름다운 숲길과 산책로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발길 닿는 곳마다 걸으며 사색하고 지친 심신을 치유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했다. 이제 보경사는 불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세상 모든 이들을 위한 열린 안식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증명하듯 최근 보경사 템플스테이는 주로 장년층 불자 중심이었던 과거에서 벗어나, 종교가 없는 이들이나 타 종교 신자 등 30대 젊은 층까지 사색과 위로를 위해 찾는 하나의 ‘힐링 트렌드 성지’로 떠오르고 있다. ◇ 문화와 예술의 옷을 입고 대중 속으로 탄원 스님이 이끄는 보경사의 가장 큰 특징은 ‘문화와 예술’을 적극적으로 접목했다는 점이다. 스님은 부임 이후 ‘진경산수 문화예술제’, ‘내연산 별빛 음악회’, ‘전통 사찰음식 전시 및 시식회’ 등 다채로운 문화 행사를 꾸준히 개최해 왔다. 이는 종교와 이념, 세대를 넘어 지역 사회와 자연스럽게 교감하고 소통하는 훌륭한 가교 역할을 해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지난 17일에는 경내에서 155평 규모의 ‘전통문화체험관’ 상량식을 성황리에 개최했다. 이곳은 단순한 관람 공간을 넘어 명상, 다도, 사찰 음식, 전통 공예 등을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조성될 예정이다. 탄원 스님은 “전통문화체험관은 보경사가 단순한 기도와 참배의 공간을 넘어, 민족 문화의 자부심을 공유하고 현대인들이 정신적 풍요를 채워가는 핵심 기지가 될 것”이라며 “상량식을 무사히 마친 만큼, 남은 불사를 차질 없이 진행해 지역민과 관광객 모두에게 자랑스러운 문화 공간을 선보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 성보(聖寶)의 가치를 드높이는 ‘보물 제조기’ 문화재 전문가 교계와 문화계에서 탄원 스님은 대표적인 ‘문화재 전문가’로 통한다. 스님은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장과 국가유산청(옛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며 성보 문화유산의 보존과 가치 선양에 평생을 헌신해 왔다. 이러한 스님의 깊은 안목과 원력은 보경사 부임 이후 빛을 발했다. 스님의 세밀한 고증과 노력 덕분에 지난해 보경사의 역사적 상징물인 ‘천왕문’과 ‘오층석탑’이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지정문화유산 ‘보물’로 각각 지정되는 경사를 맞이했다. 이로 인해 보경사는 명실상부한 문화유산의 보고로 다시 한번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됐으며, 신도들과 지역 사회 역시 큰 자부심을 갖게 됐다. 스님은 “사찰의 성보문화유산은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신앙, 그리고 예술 혼이 그대로 살아 숨 쉬는 민족의 자산”이라며 “이를 제대로 고증하고 기록해 국가 보물로 지정받는 일은 우리 세대의 당연한 의무이자, 우리 민족의 자부심을 지키고 후대에 온전히 물려주기 위한 숭고한 작업”이라고 역설했다. 아울러 앞으로도 경내에 숨겨진 성보들의 가치를 발굴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를 덧붙였다. ◇ 일상의 수행, “한 생각 돌리면 그 자리가 바로 극락” 탄원 스님은 치열한 경쟁과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향해 따뜻하면서도 깊이 있는 지혜의 조언을 건넸다. 스님은 일상에서의 마음가짐이 곧 수행이며, 행복과 불행은 결국 자신의 마음에 달렸다고 강조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번뇌의 원인을 외부 환경이나 타인에게서 찾으려 합니다. 하지만 냉철히 들여다보면 번뇌는 결국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집착과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나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고, 이기적인 마음에서 한 걸음 물러나 조금 더 양보하면 마음속에 엉겨 붙어 있던 응어리는 자연스럽게 녹아내리기 마련입니다.” 이어 스님은 올해 조계종 연등회 주제인 ‘마음은 평안으로 세상은 화합으로’를 언급하며,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부처님의 말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강조했다.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감당하기 힘든 괴로움이나 시련을 마주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어두운 상황일지라도 마음의 방향을 긍정으로 돌려 그 안에서 배움을 찾으려 노력한다면 번뇌는 곧 지혜로 바뀌게 됩니다. 생각을 바꾸는 찰나의 순간, 우리가 서 있는 거칠고 힘든 자리가 그대로 평화로운 극락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탄원 스님은 “경제가 어렵고 사회가 다변화될수록 주변의 소외된 이웃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자비의 실천이 절실하다”며 “이번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마음에 쌓인 해묵은 미움과 불안은 모두 내려놓고, 세상 모든 가정과 일터에 부처님의 대자대비한 광명과 평안이 가득 깃들기를 진심으로 축원한다”고 미소를 지으며 축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포항 보경사 주지 탄원 스님 약력] 은사: 자승 스님(전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학력: 중앙승가대학교 졸업 주요 경력: 이천 해룡사 주지·용인 대덕사 주지 역임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장 역임 경주 남산 열암곡 마애부처님 바로모시기 추진단장 역임 대한불교조계종 제16대, 17대 중앙종회의원 역임 대한불교조계종 제18대 중앙종회의원(현) 포항 내연산 보경사 주지(현)

2026-05-17

노화 탈출속도

세계적인 발명가이자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1948~)이 2032년부터 노화 속도보다 노화의 치료와 복구 기술 발전 속도가 더 빨라질 것이라 주장하여 화제(話題)다. 이것은 노화로 인한 손상의 누적보다 노화를 치료하는 기술 발전이 빨라짐으로써 시간이 갈수록 기대 건강수명이 계속 연장되는 상태를 뜻한다. 이것을 간단히 표현한 것이 ‘노화 탈출속도(LEV)’다. 커즈와일은 지금부터 3년 후인 2029년 ‘범용 인공지능(AGI)’이 일반화할 것이라고 예견한다. 범용 인공지능은 ‘컴퓨터로 사람과 같거나 그 이상의 지능을 구현하는 것’을 뜻한다. 그는 지구상의 모든 인간 80억 명의 지능을 능가하는 ‘초지능(ASI)’이 2040년 초에 등장하리라는 사실도 지적한 바 있다. 경이롭고도 전율할 만한 사건이 발생할 날이 가까운 것이다. ‘노화 탈출속도’가 구체적으로 실행되면, 인간은 지금처럼 1년을 살면, 수명이 1년 줄어드는 게 아니라, 1년 늘어나게 된다고 한다. 죽음이 필연이 아니라, 개인의 선택지가 된다는 얘기다. ‘노화 탈출속도’의 최초 수혜자는 부자들이 되겠지만, 신약(新藥)의 특성상 몇 년 지나지 않으면, 약값이 대폭 저렴해질 것이기에, 보편적인 수혜가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나는 커즈와일의 미래 예측을 대중 강연에서 꺼내곤 하는데, 반응이 각양각색이다. ‘노화의 종말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생로병사가 생명체에 고유한 운명일진대, 그걸 피해갈 수 있겠는가, 또한 젊어진다는 게 긍정적인 결과인지 모르겠다는 회의적인 반응도 만만치 않다. 반면에 회춘(回春)과 무병장수를 쌍수 들어 환영하는 사람도 적잖다. 언젠가 디지스트(DGIST)에서 인문학 강의를 하다가 만난 학생 하나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걸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뇌과학을 공부한다는 20대 초반의 그는 죽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밤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괴롭고, 500년은 살고 싶다고 토로했다. 내가 그에게 던진 말은 이것이다. “500년 인생 행로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지 생각해봤니?” 일론 머스크도 최소 120년에서 150년은 살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어쩌면 그것이 근미래 호모사피엔스의 평균 수명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른바 100세 시대라는 현대에 적지 않은 고령자들이 병원과 요양원을 전전하면서 늘그막에 육신과 정신의 고통 속에서 허덕이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오래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닌 시대가 21세기의 본질이다. 낙상, 치매, 뇌졸중으로 요양원 침상에서 신음하는 고령 환자들을 생각해보면, 지금과 여기에서 우리가 준비할 사안을 숙고해야 할 것이다. 어떤 슬기로운 사람은 그것을 충분한 수면, 적절한 스트레스 관리, 술과 담배 절연, 하루 2시간 운동의 생활화 같은 철칙으로 요약한다. 그는 이렇게 단언한다. ‘오래 버티는 자가 미래 기술의 혜택을 입는다.’ 영화 ‘황산벌’에서 김유신은 말한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만약 독자 여러분이 건강하게 오래 살고자 한다면, 실천할 수 있는 항목을 골라 즉시 실행에 옮기면 된다. 그것이야말로 오래 버티는 근본적인 힘이 될 것이므로!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6-05-17

교육 AI의 가능성과 한계 ···개인화 학습의 현실

40여 년 전, 교육학자 벤저민 블룸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한 명의 교사가 한 명의 학생을 일대일로 가르치면 평범한 학생도 상위 2%의 성취를 보인다는 것이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모든 아이에게 전담 교사를 붙여 줄 나라는 없다. 그래서 ‘모두를 위한 개인 교사’는 교육의 오래된 꿈으로만 남아 있었다. 생성형 AI가 등장하면서 그 꿈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였다. 지치지 않고, 24시간 답해 주고, 학생마다 다른 속도로 설명해 주는 ‘AI 튜터’. 과연 AI는 그 오랜 꿈을 이뤄 줄 수 있을까? 오늘은 그 가능성과, 좀처럼 이야기되지 않는 그 한계를 함께 들여다보고자 한다. ■ 가능성··· 6주 만에 2년 치를 배우다. 가장 인상적인 증거는 아프리카에서 나왔다. 세계은행이 2024년 나이지리아 에도주의 고등학생 800여 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실험이다. 방과 후 6주 동안, 교사의 지도 아래서 학생들이 AI와 대화하며 영어를 공부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AI를 쓴 학생들의 성취도는 그렇지 않은 학생보다 평균 0.3 표준편차 높았는데, 이는 보통 학교 교육 1.5~2년 치에 해당하는 향상이었다. 세계은행이 비교한 전 세계 교육 프로그램의 80%보다 효과가 좋았다. 핵심은 ‘AI 에게 무엇을 시켰는가’였다. 연구진은 AI를 답을 베끼는 도구가 아니라, 학생이 스스로 생각하도록 질문을 던지는 ‘튜터’로 설계했다. 그리고 교사가 옆에서 학생이 딴 길로 새지 않도록, AI가 틀린 말(환각)을 하면 바로잡도록 도왔다. 수업에 더 많이 참여한 학생일수록 더 많이 늘었다. AI가 ‘잘 쓰이면’ 어떤 일이 가능한지를 보여 준 사례다. 이런 흐름은 빠르게 번지고 있다. 칸아카데미의 AI 튜터 ‘칸미고’, 구글·오픈AI 등이 내놓은 학습 전용 모드까지, 글로벌 교육 기업들은 앞다투어 개인화 학습 도구를 선보이고 있다. 이들이 내세우는 강점은 비슷하다. 학생이 막히면 같은 개념을 수준에 맞춰 몇 번이고 다시 설명해 주고, 틀린 부분을 그 자리에서 짚어 주며, 면박을 주거나 지치는 일이 없다. 한 명의 교사가 서른 명에게 동시에 해 주기는 어려운 일이다. ■ 현실··· 1조4000억 원과 8.1%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정부는 2025년 3월, 세계에서 가장 야심 찬 실험에 나섰다. 수학·영어·정보 교과에 ‘AI 디지털교과서(AIDT)’를 도입한 것이다. 학생 개개인의 학습 데이터를 분석해 맞춤형 문제를 내주는, 바로 그 ‘개인 교사’의 꿈이었다. 그러나 1년 뒤 성적표는 냉정했다. 2025년 12월 감사원 발표에 따르면, 3년간 1조4000억 원이 투입된 이 사업에서 AIDT를 열흘 이상 사용한 학생은 평균 8.1%에 그쳤다. 한 번도 접속하지 않은 학생이 60%였다. 감사원은 현장 의견 수렴이나 시범 운영 없이 졸속으로 추진된 점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결국 AIDT는 ‘교과서’라는 법적 지위마저 잃고 ‘교육자료’로 격하됐고, 일부 교육청은 2026년 예산 편성을 보류했다.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교사가 준비되지 않았고, 학교 현장이 설득되지 않았으며, ‘왜 이것을 써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없었다. 좋은 도구도 쓰는 사람과 환경이 받쳐 주지 않으면 비싼 애물단지가 된다는, 오래된 교훈의 재확인이었다. 또 하나의 묵직한 숙제는 데이터다. AIDT는 학생의 학습 이력을 잘게 분석할수록 똑똑해지지만, 그만큼 483만 학생의 민감한 기록이 국가와 민간 기업의 서버를 오간다. 미국과 EU가 최근 아동 교육 데이터 보호 법제를 강화하고, EU가 교육용 AI를 ‘고위험’ 등급으로 분류한 것도 같은 우려에서다. 개인화의 정확도와 정보 보호는 쉽게 맞바꿀 수 있는 거래가 아니다. ■ 더 깊은 한계 ··· “성적은 올라도 배움은 사라진다” 더 근본적인 질문도 있다. AI가 정말 ‘학습’을 돕는가? 아니면 ‘학습한 척’을 돕는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연구팀이 튀르키예 고등학생 약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은 서늘한 답을 내놓는다. 챗봇으로 공부한 학생들은 문제 풀이 단계에서는 성적이 크게 올랐다. 하지만 AI를 치우고 시험을 보자, 종이 교과서로 공부한 학생보다 오히려 평균 17% 낮은 점수를 받았다. 답은 얻었지만, 실력은 남지 않은 것이다. 이른바 ‘인지적 오프로딩(cognitive offloading)’ 현상이다. 기억하고 계산하고 판단하는 일을 자꾸 외부 도구에 맡기면, 그만큼 우리 뇌는 덜 쓰이고 덜 자란다. 카네기멜런대와 마이크로소프트의 2025년 연구, MIT의 ‘인지 부채(cognitive debt)’ 연구도 비슷한 경고를 보낸다. AI를 신뢰할수록 비판적 사고는 줄어든다는 것이다. 특히 뇌가 20대 중반까지 자라는 청소년에게, 생각의 과정을 통째로 건너뛰는 습관은 위험하다. ■ 그래서, 무엇이 다른가? 그렇다면 AI를 교실에서 다시 몰아내야 할까. 답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나이지리아와 한국, 튀르키예의 사례를 나란히 놓으면 오히려 다른 길이 보인다. 성패를 가른 것은 AI의 성능이 아니라 ‘설계’였다. 효과를 본 경우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 AI가 답을 주는 대신 질문을 던지게 했다. 둘째, 교사가 사라지지 않고 학습의 설계자이자 코치로 남았다. 셋째, 학생이 ‘AI 에게 무엇을 어떻게 물을지’를 스스로 고민하게 했다. 반대로 실패한 경우는 기기와 예산만 쏟아붓고, 정작 사람과 수업 설계를 놓쳤다. 올해 OECD가 펴낸 교육 분야 생성 AI 보고서의 결론도 같은 맥락이다. 범용 챗봇을 검증 없이 교실에 들이면 학생은 ‘수동적 소비자’가 되고 교사는 ‘감독자’로 전락한다. 교육은 분명한 교육적 목적으로 ‘설계된’ AI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 우리 지역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그렇다면 지역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필자가 생각하는 ‘AI 교육특구’ 구상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 ‘AI 교육특구’는 하나의 구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 구상의 출발점은 ‘AI를 잘 쓰는 학생’이 아니라 ‘AI와 함께 지역의 문제를 푸는 학생’에 있다. 앞서 본 ‘성과와 학습의 분리’라는 함정을, 제도 설계 단계에서부터 피하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설계의 핵심 장치는 세 가지다. 첫째, 학생이 매주 ‘AI에게 무엇을 물었고, 결과는 어땠으며, 나는 무엇을 배웠는가’를 적는 메타인지 일지를 의무화한다. 답이 아니라 사고의 과정을 남기게 하는 것이다. 둘째, 3개월·6개월·1년으로 이어지는 단계별 과정에서 학생이 직접 철강 산업의 탄소 배출, 인구 감소, 해양 환경 같은 포항의 실제 현안을 다루게 한다. 가상의 문제집이 아니라 ‘내가 사는 도시’가 교재가 된다. 셋째, 교사는 지식 전달자에서 물러나 ‘학습 설계자이자 코치’로 역할을 바꾼다. 나이지리아 실험에서 교사가 맡았던 바로 그 역할이다. 이를 떠받치는 것은 지역의 자산이다. 포항에는 포스텍(POSTECH)의 AI 대학원, 한동대, 그리고 국내 유일의 애플 디벨로퍼 아카데미가 있다. 여기에 포스코·포항테크노파크 같은 산업 현장과 교육부의 ‘교육발전특구’ 제도를 결합하면, 학교 혼자가 아니라 대학·기업·행정이 함께 학생을 키우는 생태계가 만들어진다. 그동안 부서별로 흩어져 있던 단기 교육 사업들을 하나의 성장 경로로 꿰는 일이기도 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포항만의 처방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느 도시에나 옮길 수 있는 원칙이 담겨 있다. 지역의 대학·기업을 학교와 연결할 것, 그 지역이 실제로 안고 있는 문제를 학습의 소재로 삼을 것, 기기 보급보다 교사 연수와 수업 설계에 먼저 투자할 것, 그리고 학생에게 답이 아니라 ‘질문하는 힘’을 남길 것. 광주가 ‘AI 교육원’을 세워 도시 전략과 학교 교육을 잇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화려한 장비를 들이는 일보다 ‘왜’와 ‘어떻게’를 먼저 설계하는 도시가, 결국 앞서갈 것이다. ■ 닫는 말 개인화 학습의 꿈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AI는 그 꿈을 ‘저절로’ 이뤄 주는 마법이 아니다. 좋은 망치가 좋은 목수를 만들지 못하듯, 좋은 AI가 좋은 학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블룸이 발견한 일대일 교육의 힘은, 사실 기술이 아니라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끝까지 살피는 관계’에 있었다. AI는 그 관계를 대신할 수 없다. 다만 교사가 더 많은 아이를 더 깊이 살필 수 있도록 도울 수는 있다. 가능성과 한계 사이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손잡이는, 결국 사람이다. /서용운 계명대 글로벌 창업대학원 벤처창업학과 교수

2026-05-17

“조선시대부터 500년, 지도로 살아나는 포항의 숨결···‘첫 야외 고지도전’ 열린다”

조선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5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도도히 흘러온 포항의 변천사를 지도를 통해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는 특별한 야외 전시가 마련된다. 빡빡한 도심 속, 시민들이 가장 친숙하게 찾는 산책로를 활용해 포항 최초로 시도되는 고지도 야외 전시다. 포항문화원(원장 박승대)은 오는 5월 21일부터 23일까지 사흘간 양학동 방장산터널 고가도로 아래 숲길에서 ‘포항 옛지도 전시회’를 개최한다. ‘지도로 읽는 포항, 길에서 만나는 역사’를 주제로 한 이번 행사는 수많은 시민이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접하고 호흡할 수 있도록 기획됐다. 이번 전시는 더 많은 시민에게 다가가기 위해 현수막과 이젤을 활용한 개방형 공간으로 운영된다. 산책을 즐기러 나온 시민이라면 별도의 예약이나 까다로운 절차 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거닐며 관람할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다. 특히 지역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도심 숲으로 과감히 끌어들인 이번 행사는, 포항문화원이 지역 문화 대중화를 위해 마련한 유례없는 새로운 시도로 눈길을 모은다. 전시의 전문성과 완성도도 탄탄하다. 포항문화원 문화연구소(소장 김윤규)가 기획을 총괄한 가운데, 오랜 세월 포항의 옛 지도를 추적하고 연구·발간해 온 권용호 문화연구소 부소장이 전시 구성 전반을 주도했다. 그동안 축적된 깊이 있는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다소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고지도와 지지(地誌) 사료들을 시민의 눈높이에 맞춰 쉽고 친근하게 풀어냈다. 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포항의 변천사를 지도를 통해 입체적으로 조명하며, 지역민과 연구자들에게 역사적 통찰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단순한 지리 정보를 넘어 지역의 옛 지형과 생활상, 행정구역의 변천사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역사적 기록물인 고지도 총 8점이 이번 전시에서 베일을 벗는다. 전시 라인업에는 △동여비고(1682)를 비롯해 △해동지도(1750, 장기) △조선지도(1750, 연일) △대동여지도(1861, 영일) △1872년 지방지도(장기·포항진) △흥해군 읍지도(1905) △조선총독부지도(1913, 흥해) △조선총독부지도(1917, 포항) 등 8점의 고지도가 포함됐다. 아울러 고지도의 행간을 입체적으로 메워줄 △영일읍지 △포항지 △일월향지 △포항시사 등 귀중한 지역 지지사료도 함께 차려져 포항의 과거를 다각도로 조망할 수 있게 돕는다. 현장을 찾는 관람객들을 배려해 운영 시간도 유연하게 구성했다. 목요일과 금요일(21~22일)은 직장인 퇴근 시간을 고려해 오후 1시부터 7시까지 운영되며, 주말인 토요일(23일)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문을 열어둔다. 박승대 포항문화원장은 “이번 전시는 시민들이 평범한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지역의 역사와 마주하고, 우리가 사는 공간의 시간적 깊이를 체감할 수 있는 뜻깊은 기회가 될 것”이라며 “많은 시민이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하듯 들러 포항의 옛 모습을 만나보길 바란다”고 전했다. 전시 기획을 이끈 김윤규 문화연구소장은 “어렵게만 느껴지던 역사 사료를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도록 대중성에 중점을 뒀다”며 “시민들이 ‘지금 서 있는 이곳의 과거’를 직접 체감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는 살아있는 지역사 교육의 장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6-05-16

다시 찾은 봄, 포항 ‘정애원’에 울려 퍼진 ‘어머니의 마음’

포항 노인 복지의 상징인 노인요양시설 정애원(원장 김한수)에 어르신들의 환한 미소가 다시 꽃피었다. 2년 전 폐업의 아픔을 딛고 재개원한 이후 처음으로 맞이한 이번 어버이날은 어르신과 가족들에게 잊지 못할 감동의 시간이 됐다. 정애원은 지난 5월 8일 원내 강당에서 ‘어버이날, 사랑을 나누는 행복한 하루’ 행사를 개최했다. 이번 행사는 지난 2022년 노사 갈등으로 인한 폐업의 아픔을 딛고, 2024년 11월 사회복지법인 열린가람이 시설을 재정비해 문을 연 이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어버이날이라 그 의미가 더욱 깊었다. 이날 행사장은 카네이션을 가슴에 단 어르신들의 미소로 가득 찼다. 정애원 직원들은 정성껏 준비한 카네이션을 어르신 한 분 한 분께 달아드리며 존경의 마음을 표했다. 특히 전 직원이 함께 부른 ‘어머니의 마음’ 노래가 울려 퍼지자 일부 어르신과 보호자들은 눈시울을 붉히며 감동을 나누기도 했다. 지역 사회의 재능 기부도 빛을 발했다. 포항시북부장애인종합복지관 루미에르 앙상블의 감미로운 연주와 포항 해오라기 색소폰 봉사단의 흥겨운 공연은 행사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어르신들은 박자에 맞춰 손뼉을 치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고, 가족들과 함께 소중한 추억을 사진으로 남겼다. 행사에 참여한 한 보호자는 “시설이 문을 닫았을 때 걱정이 많았는데, 다시 활기를 찾은 정애원에서 즐거워하시는 부모님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며 소회를 전했다. 김한수 정애원 원장은 “오늘 행사는 어르신들께 감사를 전하고 가족과 소중한 추억을 만드는 뜻깊은 시간”이라며 “앞으로도 내 가족처럼 모시는 따뜻한 돌봄과 존중받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정애원은 2024년 11월 재개원한 이후 지난 23년간의 운영경험을 바탕으로 어르신 중심의 돌봄 서비스 강화, 가족과의 소통 확대, 지역사회 연계 프로그램 운영 등 포항 노인복지의 긍정적인 변화를 주도해 나아가고 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6-05-15

노소영의 고백 “나를 바꾼 건 뜻밖의 시련···3년간 철학책에 파묻혀 찾은 답은?”

“AI가 모든 것을 최적화하는 시대, 끝까지 남는 것은 결국 인간의 마음입니다.”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이 지난 14일 포항 포스코 국제관을 찾았다. 포스텍 미래지성아카데미 ‘인문사회 마스터클래스’ 연사로 나선 그는 ‘Beyond Intelligence: What Matters?(지능 너머: 무엇이 중요한가)’를 주제로, 공학도에서 미디어아트의 새 지평을 열어온 자신의 지적 여정을 반추하며 디지털 시대 우리가 지켜내야 할 본질적 가치를 역설했다. 열띤 강연의 여운은 질의응답 시간으로 이어졌다. 객석을 가득 메운 300여 명의 청중은 강연이 끝난 뒤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질문을 쏟아냈다. 이날 오간 주요 일문일답을 정리했다. -AI가 예술적 표현까지 모방하는 시대, 인간만이 남길 수 있는 본질은 무엇인가. △결국 ‘마음’이다. 마음은 AI가 결코 대체하지 못할 영역이다. AI가 지능과 기술로 데이터와 알고리즘을 완벽하게 흉내 낼 수는 있겠지만, 인간의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고유한 마음과 그 울림은 대신할 수 없다. 효율성만을 따지는 기술 논리 너머에 있는 인간 고유의 영역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전공(공학·경제학)과 전혀 다른 예술의 길을 걷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다면. △서울대 공대와 경제학(미국 윌리엄앤드메리대학 등)을 공부하며 내 머릿속은 온통 ‘최적화’와 ‘효율성’의 문법뿐이었다. 당시에는 일반적인 직업적 궤도와는 다른 길을 걷는 예술가들의 삶이 효율성이라는 잣대만으로는 도저히 해석되지 않는 영역이었다. 하지만 나를 바꾼 것은 예상치 못한 삶의 시련이었다. 가정의 변화라는 큰 충격 앞에서 ‘왜 사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마주했고, 3년간 철학책에 침잠했다. 이러한 호기심과 질문들이 결국 전공과는 전혀 다른 길로 나를 이끌었고, 오늘의 저를 있게 한 토대가 되었다. 그 과정을 거치며 예술이 단순히 무엇을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귀중한 창의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선택하는 본인만의 기준이 궁금하다. △특별한 기준이나 거창한 계획은 없었다. 그저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일단 가보는 성격이다. 아트센터 나비를 시작할 때도 미디어아트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기보다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무대포(막무가내)’ 정신으로 가다 보니 오늘에 이르렀다. 요즘은 내가 그동안 무관심했던 ‘돈’의 본질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남들이 안 하는 것을 하는 게 목표가 아니라, 내 안의 질문을 따라가는 직관이 가장 큰 판단 기준이다. 앞으로도 숲이나 책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따라가며 그와 관련된 일을 하며 살아가고 싶다. -예술적 표현을 하다 보면 내 안의 무언가를 가감 없이 꺼내놓아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자칫 ‘천박함’으로 비쳐질까 봐 두려움이 생기기도 한다.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과 그저 ‘천박한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내 안의 본모습이 천박하게 여겨질까 봐 창작이 망설여진다. △그 고민을 하시는 분은 아마 젊은 예술가이신 것 같다. 사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양면적이다. 어떤 면에서는 속되고 거칠며(쌍스러우며), 또 어떤 면에서는 한없이 고상한 존재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보면 깨닫게 된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우리 모두가 그런 면을 감추고 살 뿐이구나’라는 사실을. ‘날것의 아름다움’은 바로 거기서 나온다. 나만 천박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내면의 모순을 정직하게 마주할 때 비로소 가식 없는 진짜 예술이 시작된다. 그러니 그 경계에서 너무 두려워하지 마시라. 그 정직함이 바로 예술의 생명력이다. -일상에서 즐기는 아날로그적 취미가 있다면. △팬데믹 시절 뒷산의 소나무를 잠식하는 칡넝쿨이 미워서 칡을 캐기 시작했다. 그렇게 2년 넘게 칡을 캤는데, 놀랍게도 불면증이 사라지고 건강이 회복되었다. 이유를 찾아보니 자연 산책이 주의력과 실행능력을 높인다는 실험 결과가 있더라. 단순히 이미지를 보거나 공원을 걷는 것보다 ‘야생의 숲’을 직접 체험할 때 주의력이 가장 크게 향상된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셈이다. 자연의 ‘냄새’가 주는 치유의 힘에 매료되어 이를 ‘나비 에디션 굿즈’로 만들 계획도 세우고 있다. 칡넝쿨을 말아 나무에 걸어둔 것을 ‘교수형’에 비유하곤 하는데, 이런 원초적인 감각이 기술의 최전선에 있는 내게 새로운 창의성을 준다. -후배들과 자녀들에게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가. △아버지는 어릴 때 저와 많이 놀아주셨지만 평소 말씀은 참 없으셨던 분이다. 그런 아버지가 평생 딱 하나 당부하신 말씀이 ‘비겁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말씀이 늘 마음속 깊이 남아 지금도 비겁해지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사실 현실에서 이를 지키며 살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비겁함은 결국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는 일이다. 후배들과 자녀들이 자기 영혼을 지키며 정직하게 마주하는 삶을 살길 응원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6-05-15

“완벽을 넘어선 호흡”··· 클라라 주미 강 & 김선욱, 대구에서 펼치는 ‘거장의 대화’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 /대구콘서트하우스 제공 피아니스트 김선욱. /대구콘서트하우스 제공 세계 클래식 무대에서 독보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과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대구 무대에 함께 오른다. 오는 5월 28일 오후 7시 30분 대구콘서트하우스 그랜드홀에서 열리는 이번 듀오 리사이틀은 십여 년간 음악적 동료로 호흡을 맞춘 두 거장이 빚어내는 깊이 있는 예술적 교감을 확인하는 자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21년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 녹음으로 완벽한 앙상블을 증명했던 이들은, 이번 공연에서도 두 악기가 팽팽한 균형을 이루며 주고받는 실내악의 진면목을 선보일 예정이다. 인디애나폴리스 콩쿠르 우승 후 세계적 거장들과 협연하며 입지를 다진 클라라 주미 강의 섬세한 음색과 리즈 콩쿠르 우승자이자 최근 지휘자로도 영역을 확장하며 깊이 있는 음악 세계를 구축한 김선욱의 깊이 있는 타건이 어우러져 최고의 시너지를 예고하고 있다. 이번 공연은 18세기 고전주의부터 20세기 현대 음악에 이르는 바이올린 소나타의 변천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밀도 높은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 특히 대구콘서트하우스 ‘명연주시리즈’ 상반기 라인업 중에서도 시대별 음악 언어의 변화와 실내악의 본질인 ‘두 악기의 긴밀한 대화’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줄 무대로 기대를 모은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제1번 D장조 Op. 12-1’은 바이올린이 피아노의 보조 역할에 머물던 과거의 관습에서 벗어나 두 악기가 대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시작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초기 베토벤의 패기와 고전주의적인 형식미가 돋보이며, 밝고 경쾌한 선율 속에 숨겨진 두 악기의 긴밀한 상호작용이 연주의 핵심이다. 레스피기 ‘바이올린 소나타 b단조 P. 110’은 이탈리아 근대 음악의 거장 레스피기가 남긴 작품으로 후기 낭만주의의 화려한 색채와 치밀한 구조적 완성도를 동시에 보여준다. 격정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선율이 교차하며,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빚어내는 풍부한 음향적 층위가 청중을 압도한다. 바인베르크 ‘바이올린 소나타 제4번, Op. 39’은 20세기의 비극적인 시대 정서와 작곡가의 고독한 내면이 투영된 곡이다. 불안정하면서도 날카로운 음악 언어를 통해 인간의 실존적 고민을 그려내며, 바이올린 소나타라는 장르가 표현할 수 있는 심리적 영역을 한 단계 확장시킨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바이올린 소나타 Eb장조, Op. 18’은 청년 슈트라우스의 낭만적 열정과 교향곡적인 스케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페라처럼 화려하고 서사적인 전개가 일품이며, 마지막 악장에서 몰아치는 극적인 에너지는 두 연주자의 기교와 음악적 일체감을 확인시켜주는 완벽한 피날레를 장식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6-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