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문경수필가
배문경수필가

얼마전, 유튜브로 수건춤을 보았다. 백년욱은 진분홍치마에 색동저고리를 입고 춤을 추었다. 무대에서 펼쳐지는 춤은 거미가 집을 짓듯이 조용했다. 다시 무겁게, 큰 획을 긋듯이 춤추며 수건과 사람이 하나가 되었다. 하얀 수건을 들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보여주는 춤사위에 삶의 희로애락이 묻어났다.

도심의 골목 공사현장 구석에 일꾼이 쓰다 만 수건이 땀으로 찌든 채 버려졌다. 수건 가장자리에는 모 초등학교 동기회, 모년 모월 모일이라고 새겨져 있다. 올은 낡아 납작해지고 새겨진 글자도 흐릿해진 채 바닥에 나뒹군다.

공사현장 옆, 식당 주변에는 만개한 꽃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고운 빛깔 그대로 꽃은 두 번 산다. 꽃은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으므로 더욱 가벼워진 무게로 연옥을 지난 것일까. 나비의 날개마냥 납작해진 꽃잎이 책갈피에서 잠잔다. 두툼한 주인아저씨의 손에서는 핀셋이 가볍게 춤을 추듯 움직인다.

압화, 저 무게 없는 꽃이며 잎들이 사람이 되고 해와 달이 되어 소슬한 바람을 맞고 서 있는 나무가 되었다. 압화에는 숱한 사연이 깃들어 있고 한 생을 살아온 이야기꽃이 술술 풀린다.

나무에 핀 꽃이 누르미가 되어 빚어낸 장면, 장면은 이야기다. 가족이 오순도순 모여 있고 한가위 보름달 아래 강강술래를 하는 처녀들의 고운 치맛자락이 휘날린다. 꽃잎이 사람의 얼굴이 되고 줄기는 나무가 되어 꽃은 꽃으로 다시 환생한다. 꽃이 만개했을 때, 따온 꽃들은 티슈페이퍼를 깔고 덮고 두꺼운 책 속에서 한동안 잠을 잔다. 아저씨의 젖은 수건에서도 꽃향기가 묻어났다.

향기 나는 동백기름을 바르고 쪽진 머리를 하신 어머니는 여름 긴 장마를 걱정스러워했다. 가족들이 쓰고 내놓는 수건을 빨지 못하면 쉰내가 났다. 하루 이틀 비가 쉴 새 없이 내리면 세탁기도 없던 시절 각자가 수건을 쓰고 빨아서 간수해도 냄새는 떠나지 않았다. 잠시 잠깐 말간 하늘이 보이면 장대를 세워 시원스레 수건을 말렸다. 바람에 수건은 춤을 추었다.

풀벌레 소리, 개구리 소리가 마당 가득 들어차는 계절, 밭일 논일에 치쳐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의 목은 땟물에 젖어있었다. 아버지는 등목을 시원하게 하시곤 흘러내리는 물을 닦으셨다. 머릿수건을 벗으며 마당으로 들어서던 어머니는 수건으로 온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어스름한 저녁에 밥상을 물리면 곧이어 밤이 깊었다. 일을 끝낸 깊은 밤에서야 진주 빛이 담겼던 당목수건을 풀었다. 어머니는 더워도 추워도 먼지가 많은 일을 할 때도 집안일을 할 때도 항시 쪽진 머리를 감쌌다. 오랫동안 쪽머리에 비녀를 꼽고 사신 분이었다. 기름을 묻혀 참빗으로 곱게 빗으면 윤기가 났다. 수건은 농사지을 때나 집안일이거나 어린 나의 콧물을 닦아주거나 잔칫집 떡도 담겼다. 어머니의 머릿내와 눈물이 섞여 원숙한 모란꽃 향기가 났다.

어머니와 첫 세상을 만난 순간부터 수건과 나는 하나가 되었다. 세수하면서 나의 임무는 사회와의 깊은 호흡을 맞추었다. 씻고 나서야 시작이 되는 사회와 인간관계. 그것이 엇박자가 되면 밀려서 저만치에서 홀로 훌쩍이면 패자의 수건처럼 구겨졌다. 다시 힘을 얻어 세상과 맞장 뜰 때는 바람에 펄럭이는 힘찬 수건 같았다. 수건의 가장자리에 새겨진 인쇄처럼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추억으로 남았다.

다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과의 행사, 축하할 일들은 또한 지켜야할 사회덕목 중에 하나다. 두툼하거나 얇은 수건에 따라 경제사정을 읽기도 하고 수를 놓았는지 쿡 찍은 인쇄물인지에 따라 성향을 파악한다. 한 가족이 된 수건에서는 일상이 담겨있다. 일상이란 꽃 한 송이가 핀 수건을 세탁한다.

수건에는 삶의 모양을 닮은 꽃이 박혔다. 피어나지 못하고 바로 압화가 된 꽃송이 서너 개가 보인다. 어머니의 탄식이나 아버지의 땀 냄새, 막 학교를 들어가 뛰어다니던 나의 눈물과 콧물, 그리고 사회 속에서 이어지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추억의 장면들이 수건 속에 있다.

수건을 씻어 장대를 세운 빨랫줄에 넌다. 눌려있던 꽃들이 바람결에 선명해지며 돋아난다. 마지막 한 방울의 꽃향기 폴폴 콧등을 간질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