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피카소(1881∼1973)의 한국 전시회가 개최중이다. 천재 화가의 110여점의 작품 전시에 미술 애호가들이 모여들고 있다.

오래전 유럽 여행길에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을 찾은 적이 있다. 그 언덕 위 성당 옆 프랑스 화가들이 초상화를 그려 파는 현장을 둘러보았다. 피카소도 한때 이곳에서 그림을 그려 생계를 유지했다는 장소이다. 피카소가 자주 찾았다는 길가의 어느 카페에서 시원한 맥주 한잔을 했다.

피카소는 스페인 출신 화가이다. 그는 파리에서 그 특유의 입체파 예술혼을 키웠다. 자유분방한 도시 파리에서 피카소는 63세인 1944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게 된다. 당시 프랑스 공산당은 ‘인간 얼굴을 한 공산주의’라는 슬로건으로 프랑스의 많은 지식인들을 끌어들였다. 자유분방한 피카소도 ‘계급 없고, 소외되지 않는 공산주의’이론에 현혹되어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특히 의회주의를 통한 민주적 방식의 공산 정권의 수립은 프랑스 지식인들의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프랑스 공산당은 1970년대 약 20%의 지지를 얻었으나 지금은 쇠퇴일로에 있다. 이번 전시회에는 피카소가 그린 폭 2m의 ‘한국에서의 학살’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피카소는 6·25 전쟁 이듬해 1951년 이 작품을 완성했다. 프랑스 공산당이 당원인 피카소에 의뢰하여 그린 대작이다. 1950년 한국 전쟁은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파견되고 중공군이 개입되어 많은 인명이 살상되었다. 이 그림은 총칼을 든 군인들이 임산부를 포함한 여성 4명과 어린이를 조준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무장한 군인들이 약한 여성과 천진난만한 어린이를 발가벗겨 조준하는 모습은 대단히 끔찍하다. 공산당은 그에게 미군의 전쟁 횡포를 이미지화한 그림을 요구했지만 그것이 드러나지 않아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이 그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북한에서는 피카소의 이 그림을 미군의 만행이라고 선전한바 있다. 북한 당국은 북한 인민군의 양민학살은 없었다고 강변하면서 이 그림이 미군의 황해도 신천 3만명 양민 학살 사건을 상징한다고 선전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이 미군의 학살이라고 단정할 근거가 전혀 없다고 평가한다.

오히려 스페인 출신 화가 피카소가 스페인 내전 시 나폴레옹의 침범을 연상하여 이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폴란드에서는 피카소의 이 작품을 모작하여 소련의 폴란드 침공 비판용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화가 피카소의 이 작품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는 한국 반입과 전시가 금지되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끝난 지 어언 7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6·25를 소재로 한 노래와 영화, 연극은 아직도 도처에 남아 있다. 북한당국은 선전 포스터를 통해 6·25 전쟁 시 미군의 만행을 선전하였다. 세계적인 명장의 손으로 그려진 이 그림의 작품성은 비록 낮지만 전쟁의 비극성을 표출한 것은 틀림이 없다. 이 작품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라도 명장 피카소의 그림만큼은 이 기회에 직접 볼 필요가 있다. 피소가 살아서 북한지역을 방문하였다면 어떤 그림 소재를 착상했을까 그것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