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지난 5월 11일은 세 번째 맞이하는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다. 1894년 3월 20일 (음력) 봉기한 동학 농민들은 조선의 낙후한 봉건 체제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일제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고자 두 번째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은 그해 4월 7일 (양력 5월 11일) 황토현 전투에서 농민군이 대승을 거둔 날을 기념하는 것이다. 풍전등화의 조선을 구하려 했던 동학농민혁명은 오늘도 우리를 비추는 등불이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정읍)에서 봉기한 동학 농민군은 파죽지세로 4월 27일 전주에 입성한다. 무능하고 부패한 조선왕조는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여 5월 5일 아산에 청병 3천이 상륙한다. 호시탐탐 조선 침략을 노리던 일본은 5월 6일 인천에 4천 병력을 투입한다. 내정 문제가 국제전쟁으로 비화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청일전쟁이 벌어지게 된 형국이다.

전봉준은 조선 정부와 서둘러 27개 조목의 ‘폐정개혁안’을 맺고 화의한다. 그 가운데 14개 조목이 전하는데, 크게 두 갈래다. 그 하나는 왕의 총명을 가리고 국권을 농락하는 무리를 몰아내고, 탐관오리를 처단하라는 국정 쇄신이고, 그 둘은 민생고를 해결하라는 방책이다. 수령과 관장(官長)들의 적폐를 일소하고, 각종 부역과 세금을 낮추라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이런 요구를 순순히 들어줄 리가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동학 농민군은 전라도에 집강소 53개를 설치하여 직접 개혁에 나선다. 이에 전라감사 김학진이 포용적인 자세를 보여 ‘폐정개혁안’ 12항이 합의되기에 이른다. 탐관오리와 횡포한 부호, 불량한 양반과 유림의 징벌, 노비문서 소각, 칠반천인(七班賤人)과 백정의 차별철폐, 청상과부의 재혼 허가, 토지 분작(分作) 등이 ‘폐정개혁안’에 담긴다.

신분제로 인한 적폐의 누적과 그것이 양산해내는 탐관오리와 유림의 징벌, 최하층 인민의 존중은 조선왕조를 지탱해온 근간을 뒤흔드는 것이었다. 여기에 노비문서를 태우고, 과부의 재혼을 허가하며, 토지를 평균하여 분작한다는 것은 혁명 이상을 담고 있다. 1392년 성립하여 장장 500년 세월을 이어온 늙고 쇠락한 왕조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 자명하다.

나는 토지의 평균 분작에 특히 주의한다. 토지를 경작하는 자가 토지를 소유한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을 천명한 것은 획기적인 사변이기 때문이다. 지주와 소작인의 대립과 갈등이라는 오랜 불평등을 개혁하려는 의지가 뚜렷하게 드러나 있는 대목 ‘토지의 평균 분작’이다. 얼마 전 ‘한국토지주택공사 LH’ 비리로 다시 불거져 나온 부재지주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목소리가 동학농민혁명으로 더 크게 들려오는 듯하다.

예나 지금이나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이라는 명제는 국가의 첫 번째 존립 조건이다. “백성의 믿음이 없다면 국가는 존립할 수 없다.” 어느 국가든 정권이든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반드시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동학농민혁명은 오늘도 명명백백하게 웅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