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이재현
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무심코 써 본 아버지의 돋보기 / 그 좋으시던 눈이 / 점점 나빠지더니 / 안경을 쓰게 되신 아버지, / 렌즈 속으로 / 아버지의 주름살이 보인다. // 돋보기 안경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 아버지의 주름살이 / 자꾸만 자꾸만 / 파도가 되어 밀려온다.”

2010년 세상을 떠난 이탄 시인의 마지막 시집 ‘동네 아저씨’(2006, 학이원)에 실린 ‘아버지의 안경’의 첫 연과 마지막 연이다. 시인이 1940년생이었으니 이 시를 지을 무렵에는 그 역시 돋보기 안경을 썼거나 다초점 안경을 썼을 터. 만년의 시인은 안경을 쓰면서 아버지의 안경을 생각하고 아버지의 주름을 읽어내었다. 자신의 노안 안경에 투영된 아버지의 주름은 파도가 되어 그의 가슴 속으로 자꾸 밀려 왔을 것이고, 아버지로부터 자신에게까지 이어진 긴 세월의 자국으로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정희성 시인도 이탄 시인의 시와 같은 제목의 시 ‘아버지의 안경’에서 “돌아가신 아버님이 꿈에 나타나서 / 눈이 침침해 세상일이 안 보인다고 / 내 안경 어디 있냐고 하신다”고 아버지를 노래한다. 아버지의 유품 안경으로 아버지를 기억하고 더듬는 것일 게다.

나이가 들면 가장 먼저 그 티를 내는 것이 눈이 아닐까 싶다. 당신의 네 아들은 모두 안경을 썼지만 나의 아버지는 안경을 끼지 않으셨다. 그런데, 50대 중반을 넘기시면서 돋보기 안경을 끼셨다. 많지 않은 연세에 병으로 집에 계셨던 아버지는 늘 책상다리로 앉아 오랜 시간 성경을 읽으셨다. 콧등에 안경을 내려 쓰고 성경을 읽으시는 병약한 모습은 신기하게도 영성과 지성을 함께 풍기기까지 하였다.

성경을 늘 옆에 두고 읽으셨던 아버지께서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아버지께 가훈을 들은 기억도 없다. 좋아하시는 성경구절도, 가훈도 물려받지 못하였지만, 안경 너머 성경을 보시며 잔잔하게 소리내어 읽으시던 그 모습과 말씀을 좇아 살려 애쓰셨던 그의 삶은 내 눈과 마음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것이 ‘경건한 믿음의 사람, 건강한 생활의 사람’이라는 내 좌우명의 고갱이가 되었다.

결혼 후 “서로 돕고 사랑하며 부지런히 배우자.”라는 처가의 가훈을 들었다. 아버님은 당신의 딸들이 어렸을 때부터 이 가훈을 늘 소리내어 말하게 하셨고, 그 말처럼 세 딸들은 어느 집 못지않은 사랑으로 똘똘 뭉쳤고, 열심히 공부했고, 각자 가정을 이룬 지금도 서로 도우며 인생 후반기를 아름답게 보내고 있다. 처가의 가훈은 자연스레 내 좌우명과 더불어 우리 집의 가훈으로 녹아들었다.

성경에는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잠언 4장 1절)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다윗왕이 아들 솔로몬에게 한 말이다. 솔로몬이 전무후무한 지혜의 왕이었다는 말을 후세에 듣고 있지만, 아버지의 교훈이 없었더라면 그의 지혜도 없었을 것이다.

가정의 달 5월이 절반 가까이 지나가고 있는데 부모의 자녀 학대라는 어두운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부모님, 어른들의 교훈이 새삼 그립다. 설령 ‘라떼는 말이야’ 식이냐고 구닥다리 취급을 받을지언정 가정마다 가훈을 만들어 보자고 나는 말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