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동경제대 영문과 출신으로 소세키 문하에서 주로 단편소설을 쓰면서 근대 일본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자리매김하였으나, 신경쇠약 등을 겪으며, 1927년에 자살했다. 작가의 이름을 딴 아쿠타가와상이 제정되어 현재 일본의 가장 유력한 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지금 여기 수많은 타인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진짜 모습은 파악할 수 없다. 인간은 자기가 달려가면서 달려가는 자신의 모습조차 동시에 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머리 앞에 붙어 있는 두 개의 눈은 우리의 머리의 앞쪽, 우리가 달려가는 방향을 향해 직선을 이루고 있는 지평선을 바라볼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그렇게 달려가듯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는 우리의 눈앞만을 바라보기 급급할 뿐, 우리가 놓여 있는 전체의 상을 조감하는 시선을 가질 수 없다.

작가 이상(1910~1937)은 빛의 속도 이상으로 달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갖는 눈앞의 시선과 조감하는 시선을 동시에 얻는 상상적 풍경을 그리고자 했다. 그가 썼던 ‘삼차각설계도 연작’이나 ‘오감도 연작’의 시들이 바로 그렇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따라 빛의 속도 이상으로 달려 수많은 ‘나’를 만나는 시도였던 셈이다. 하지만 소설 ‘날개’를 지나 ‘동해’로 넘어가면서 이상은 자신이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의 마음조차 알 수 없는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울창한 삼림 속을 진종일 헤매고 끝끝내 한 나무의 인상을 훔쳐오지 못한 환각의 인(人)”임을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선언했다. 빛의 속도를 거론하며 13인의 아이들이 펼쳐놓았던 조감하는 시선을 통해 고리타분한 세상에 저항했던 야심만만했던 이상은 결국 자기 눈앞에 있는 한 사람의 똑같이만 보이는 표정들이 담고 있는 의미조차 알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거나, 혹은 절망한 척을 했던 것이다.

하나의 시대가 가지고 있는 의미나 색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 시대의 과제가 종료되어 그 시대가 갖는 의미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아직 삶의 열기가 남아 있는 엇갈리는 시선이 아니라 그것을 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조감의 시선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과연 우리에게 그 조감의 시선이 허용될 것인가. 시대를 기록하는 작가의 딜레마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1927)의 소설 ‘덤불 속(1922)’은 바로 이러한 작가의 딜레마가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다. 덤불 속에서 ‘타조마루’라는 도적이 아내를 말에 태워 데리고 가고 있던 무사를 공격하여 무사를 죽이고 아내를 겁탈한다. 그 사건의 주변에서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이 사건에 대해서 제각기 증언한다. 결국 무녀에 의해 죽은 무사의 혼령까지 초혼하지만 그 사람들이 심문에서 답한 내용은 다 각자 자기의 입장에 근거해서 자기가 볼 수 있는 시선의 한계를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나무꾼과 탁발승, 도적 타조마루, 무사의 아내와 무사의 혼령까지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심문 내용을 모아두었을 뿐인 이 짧은 소설에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지금 이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각각의 눈으로 본 세계들의 총합이 아무리 풍부하더라도, 조감하는 눈으로 내려다본 한 차원 위의 세계가 될 수 없다는 이른바 불가해성에 대해 말한다. 눈앞에 달린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은 모두 마찬가지라는 사실만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진실일 것이다.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1910~1988)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 ‘라쇼몽(羅生門·1915)’과 이 ‘덤불 속’을 합쳐, 영화 ‘라쇼몽’을 만들었다. 그는 ‘라쇼몽’의 이야기를 겉의 액자로 사용하고, ‘덤불 속’의 이야기를 속 내용으로 넣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라쇼몽 아래에서 비를 긋다가 추위와 배고픔에 누각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이들의 소설 속 이야기는 ‘덤불 속’의 아귀다툼을 증언하는 탁발승의 이야기로 옮겨갔다. 인간을 자기 눈앞의 시선에 붙드는 것은 결국 자기의 절박한 상황이다. 그럴 때 진실은 언제나 저 멀리 물러나고 만다.

/홍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