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태순수필가
양태순수필가

공원에 운동을 갔다. 어느새 철쭉이 활짝 봄을 맞이하고 있다. 눈길 닿는 곳마다 연두에서 초록으로 건너가는 잎들의 부지런함이 어여쁘다. 봄물을 길어 올린 싱그러움에 취해 걸음에 봄바람이 실렸다.

맞은편에서 오는 부녀와 스쳐 지났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궁금해서 걷는 방향을 바꾸어 두어 걸음 뒤에서 걸었다. 귀를 쫑긋 앞으로 모았다. 드문드문 들리는 내용은 딸이 생각나는 대로 주저리 읊으면 아빠는 적당한 추임새를 넣었다. 별거 없구나 싶어 앞질러 가면서도 서로의 생각과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부러웠다. 부러움이 커질수록 아픔으로 피어나는 얼굴, 내 아버지였다.

철이 들기 전, 아버지는 다른 세계로 떠났다. 아버지와 나를 이어주는 고리는 핏줄 말고는 너무 미미했다. 그래서 떠나보낸 슬픔이 깊은 줄도 몰랐다. 늘 보던 얼굴이 보이지 않는 허전함에 문득문득 앉았던 자리, 누웠던 자리에 눈이 갔다. 그것이 다였다.

기억 속 아버지는 남 같은 아버지였다. 한 방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었지만 직접 소통이 없었다. 어머니를 사이에 두고 말이 전달되고 답이 돌아왔다. 내 잘못을 나무라는 일조차 어머니의 입을 빌렸다. 그리고 내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들어보지 못했다. 밖에서 놀다 집에 왔을 때 방에 아버지만 있으면 들어가기 어색해 도로 골목으로 발을 돌렸다. 어렵기만 한 아버지에게 내가 한 말은 밥 잡수세요와 다녀오셨어요, 정도였다.

딱 하루, 그날은 예외였다. 내가 중학생이었고 추석을 앞둔 어느 밤이었다. 식구들은 다른 방에 있었고 나만 아버지와 한방에 있었다. 처음으로 아버지와 중개인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짐작컨대 마음속을 다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는 묻고 나는 대답을 했던 듯싶다. 소재가 바닥 날 때쯤 윗방에서 어머니가 장에서 사온 추석빔을 입어 보라고 불렀다. 얼마나 반갑던지 냉큼 일어섰다.

중학생이었던 그날 밤에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아무리 기억하려 애를 써도 안 된다. 아버지와 나는 무릎걸음 세 번만큼 떨어져 앉았고, 나를 향해 맘껏 드러내지 않은 잔잔한 표정이며 내가 일어섰을 때 차마 잡지 못하는 아쉬운 눈빛은 생생하다. 그 장면을 수십 번 그려보았으나 제법 길었던 시간에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는 깜깜할 뿐이다. 잿더미를 헤집듯이 아버지의 갈피를 뒤적이고 뒤적여도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

살면서 아버지를 돌아보는 날은 기일이나 어버이날이었다. 나와 아버지가 만났던 시간에는 추억할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때마다 작은 에피소드를 건지겠다고 기억의 먼지를 털어내고 희미해진 여줄가리를 촘촘히 엮었다. 가장 큰 소득은 서로를 오롯이 보았던 그 밤이었다. 처음에는 특별히 기쁠 것도 슬플 것도 없는 조각이었다. 그러나 되살려놓은 장면은 해를 거듭할수록 아버지란 이름으로 뜨거워졌다.

사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아는 나이가 되었다. 살아낸다는 것은 때로는 한 모금 물이 간절한 식물처럼 애가 타기도 하지만 내일이라는 새날이 있어서 힘을 내 하루하루를 이어 일생을 이룬다는 것도 알았다. 나는 길 위에서 나름대로 부딪히고 견뎌오면서 나만의 무늬를 만들어왔다. 그것은 내세울 것도 없고 빛나지도 않지만 내 노력의 결과이니 소중하게 여긴다.

지나온 굽이의 어느 날에는 아버지를 돌아보기도 했다. 아버지의 생은 오십을 넘기면서 종착역에 닿아 멈추었다. 나는 어렸고 사는 동안 살가운 정을 표현하지 않고 마음속에만 키웠던 애정의 깊이를 알 수가 없었다. 헤어진 수십 년을 곱씹는 동안 아버지의 삶을 어머니와 형제로부터 전해 들었다. 너무나 작은 추억의 부스러기로 아버지를 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신이 차지한 내 마음자리는 늘 축축하고 아리다.

철쭉이 한창인 공원에서 낯선 부녀로 인해 아버지를 만난 날이다. 언젠가 마주하면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내본다.

“많은 날을 기억하지 못해 죄송해요” 숨을 삼켰다.

“그날 밤의 눈빛을 이제는 놓을래요. 그러나 내 아버지였음은 잊지 않을게요” 소리맴이 길다. 내 안에 갇혀있던 울새를 날려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