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스크린으로 제작된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의 ‘마를린 먼로’.

대체불가능한 토큰 이른바 NFT라고 하는 것 때문에 미술시장이 들썩이고 있다. NFT는 블록체인의 암호화 기술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 자산을 뜻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미술작품들은 그림이나 조각처럼 물질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NFT에서 거래되는 작품들은 디지털로 존재한다. 디지털 미술작품 혹은 디지털화된 미술작품 거래가 논의의 대상이 되면 진본성과 복제 가능성의 문제가 대두된다.

미술품의 경제적 가치를 결정하는 여러 요인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진본성(originality)과 희소성(scarcity)인데 디지털로 존재하는 작품에서는 진본과 복제본의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진본과 복제본이 완벽하게 동일하기 때문에 자연히 희소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블록체인을 활용한 NFT에서는 이런 문제가 극복된 듯 보인다. 디지털 작품에 고유 인식값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NFT가 어떤 작품의 원본성을 담보해 주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고유성과 유일성은 보장이 된다.

1917년 마르셀 뒤샹이 남성 소변기를 작품으로 제시한 이후 미술은 줄곧 새롭게 규정돼 왔다. 공업적으로 생산된 기성품을 미술품으로 제시한 뒤샹의 레디메이드로 인해 진본의 가치는 희석됐다. 팝 아트로 상업적 성공을 거둔 앤디 워홀의 작품들 역시 판화기법 실크스크린을 통해 제작됐다. 판화의 특성상 작품을 찍어내는 원판은 존재하지만 유일한 원본은 있을 수 없다. 인화를 통해 동일한 작품을 기술적으로 재생산 가능한 사진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복수의 진본이 만들어지면서 물리적으로 동일한 작품들에는 진본성과 희소성의 시장적 가치를 보존해 주기 위해 에디션(edition)이라는 장치가 마련됐다. 일종의 한정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워홀의 팝아트는 대중적 이미지를 재생산해 작품의 형식으로 보여준 것으로 미술 창작의 개념과 방식을 바꿔 놓았고 노동을 통한 직접 제작이라는 고전적 창작 방식에 균열을 일으키면서 미술작품에는 작가의 손길 혹은 흔적이라는 일종의 신비감과 신화적 요소가 제거됐다.

1960년대 이후 이른바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미술은 더욱 더 개념화되고 관념화되고 비(非)물질화 된다. 물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나 행위가 미술이 되고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자연현상이 미술이 되기도 한다. 고정된 형식을 취하지 않고, 보존할 수 없으며, 물질적으로 소유할 수 없는 작품에 대해 진본성을 묻는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이런 성격의 작품들은 기록과 재현의 방식을 빌려 전시되고 보존되고 소유된다.

일찍이 독일의 사상가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6년)이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미술작품의 미래를 예견한 바 있다. 벤야민의 견해에 따르자면 진본에서는 복제본과 달리 아우라(aura)가 발산된다. 그리고 그 아우라는 감상자들에게 시각적 경험을 초월한 전혀 다른 차원의 미학적 경험을 제공해 준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논리는 더 이상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디지털 작품에서는 진본과 복제본은 질적으로 완벽하게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 미술에서 진본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가치는 무엇일까?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진본이 무엇인지 물어봐야 한다. 작품창작의 과정을 아이디어가 만들어진 순간에서부터 제작과 완성까지의 단계로 본다면 진본성이 발생하는 시점은 어디일까? 일반적으로 미술가가 직접 창작한 작품을 진본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디지털 시대의 미술품들은 직접 창작이라는 고전적 잣대로 판단될 수 없다. 그리고 미학적 관점에서는 보았을 때 진본성 자체가 그렇게 의미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진본성의 문제는 오로지 미술품 소유와 소유권의 증명이라는 범주에서만 주요한 담론으로 여겨질 뿐이며 이러한 담론을 응축해 보여주는 것이 NFT를 기반으로 한 미술품의 디지털 자산화 현상이다.

/미술사학자 김석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