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태 <br>시조시인·서예가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비 내린 뒤의 신록이 한결 싱그럽다. 연하던 이파리들이 차츰 짙어져 초록세상을 수놓고 파릇한 보리는 잔잔한 파도의 속삭임처럼 여울지고 있다. 온통 푸르름으로 가득한 ‘오월은 푸르구나’의 가사처럼 5월은 아동들의 꿈이 자라고 마음이 푸른 모든 이의 푸른달이라고도 한다. 오월의 바람과 빛깔, 소리와 향기는 부신 햇살 속에 쏟아지는 자연의 멜로디처럼 들리고 보이고 흐르는 듯하다. 꽃은 피어 절로 지고 잎은 돋아 청록의 몸짓으로 마음의 자극을 주는 계절, 설렘과 희망을 파종하는 봄날이 깊어 가고 있다.

나날이 짙어 가는 풀빛과 번져가는 녹엽을 보니 초록동색(草綠同色)이란 말이 떠오른다. 풀빛과 녹색은 같은 빛깔이란 뜻으로, 긍정적인 측면에서의 같은 처지나 기풍과 뜻이 맞는 사람들이 동류를 찾아 모인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유유상종과 비슷한 말로 서로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취향이나 생각, 관점이나 신념 등이 비슷한 경우가 많다. 이같은 동류의식이 사람들과의 관계를 새로이 맺게 하고 친밀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다. 마치 꽃이나 나무, 풀들이 신록 일색으로 물결치는 것처럼.

그러나 아무리 초록이 동색이고 끼리끼리 어울린다지만, 그 이면에는 상대방과의 초점을 맞추고 공통분모를 찾아가는 이해와 노력이 있어야 최소한의 관계가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한 부류의 구성원이라도 시각의 차이와 주관이 다름을 인정하고, 말 한마디라도 긍정적이고 이타적인 방향으로 주고받으면 한결 부담 없고 편안해지지 않을까 싶다. 즉, 원활한 소통으로 서로가 공감하고 배려와 절제로 상호 존중의 미덕을 지켜나갈 때, 진정한 어울림과 향긋한 초록동색의 넉넉한 초원이 펼쳐질 것이다. 십 수년째 작은 정원이 딸린 집에 살면서 자연의 섬세한 움직임과 미묘한 변화를 가까이서 느끼고 있다. 예컨대 나무나 풀들이 자리잡고 생겨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잎이 돋고 자라는 것 같지만, 옆가지가 서로 부딪치면 적절히 한쪽으로 성장을 멈춘다거나 수분 공급을 중지해 마른 가지로 남겨두는 걸 몇 번씩 지켜봤다. 또한 앞집 담장을 넘어간 담쟁이를 앞집 주인이 매몰차게 다 걷어버리자 몇 년 후에 새롭게 돋아나는 담쟁이가 아무런 유도를 하질 않았는데도 방향을 아예 옆으로만 틀어 올해도 계속 덩굴을 뻗어가고 있다. 수목과 식물들도 이렇게 양보와 절제가 있고 경계와 견제 속에 동류상구(同類相救)로 서로를 지켜가는 듯하다. 해와 달은 모든 사물을 공평하게 비춘다(日月無私照) 해도 자연만물은 저마다의 생김새에 따른 생장과 기능, 번성의 정도가 다르다. 인간의 생리적인 활동과정이나 동·식물의 생태계는 복잡미묘하지만 공통의 요소와 차별화된 부분이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해 상생과 공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오월의 햇살은 푸른 숲 잎사귀에 샘물 같은 새뜻함을 적시고 강물 위에 금가루 같은 윤슬을 뿌려주고 있다. 비슷하면 좋아지듯이 초록으로 어우러지는 오월숲처럼 풋풋하고 사랑스럽고 숭고한 나날이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