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전 국립민속박물관장 천진기
나눔의 삶 실천하는 지식인처럼
우리시대 ‘선비의 삶’ 실천해보려 노력
포항만의 문화재·자료 연구기관 필요
새 문화콘텐츠 개발에 적극 힘써야

천진기 전 국립민속박물관장
“지방대 출신으로서 중앙정부의 박물관장이 된 것도 굉장한 행운이었지만, 띠 동물을 연구한 게 더 큰 행운이지요. 민속박물관에 항상 빚을 지고 살았는데 이제 그 빚을 갚아야 할 시점이 왔습니다. 포항이 좋아서 정착했으니까 신세 지고 빚진 것들을 되돌려 주는 일들을 꾸준히 해나가겠습니다.”

천진기 전 국립민속박물관장은 열두 띠 동물민속을 전공, 매년 띠 풀이를 하는 민속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988년 국립민속박물관과 인연을 맺으면서 그해 겨울부터 띠 동물과 관련된 자료를 정리하고 글을 쓰고 강연을 하면서 유명 인사가 됐다.

지난해 7월 포항시 북구 신광면에 정착해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그를 1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40대에 국립민속박물관 수장에 올라 화제가 됐다. 어떻게 신광에 오게 됐나.

△국립민속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문화재연구소 등에서 30년 이상을 근무하고 난 후에 어디에 정착할 것인가를 오래전부터 찾고 있었다.

지난해 7월 1일부터 이곳 신광으로 이사를 왔으니까 이제 10개월째 되는 초보 포항시민이다. 포항에서 은퇴하여 살기 위해 집도 지었으니 포항이 제2의 고향이 됐다. 포항의 청정한 바다, 넓은 들, 잘생긴 산이 있어서 자연환경에 대한 매력을 느꼈다. 영일만, 해파랑길, 물회, 과메기, 대게, 비학산, 내연산, 청하읍성 등 자연환경, 생활환경, 먹거리, 볼거리의 건강 청정 도시라고 생각한다. 고향인 안동에서 30년, 서울에서 30년, 이제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이곳 포항에서 마무리하려고 한다.

-‘누구나 가져가라’는 타인능해(他人能解)를 써놓은 종가 문화에서 인문 정신을 배웠다고 했는데 살아오면서 좌우명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경주최씨 부잣집 육훈(六訓)과 배고픈 사람은 누구나 열어서 쌀을 가져갈 수 있게 쌀 뒤주에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새긴 구례 운조루 문화류씨 쌀독에서 ‘나눔과 배려(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가문을 만날 수 있었다. 수백 년을 이어오는 종가의 가정교육은 자녀들이 ‘무엇이 될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목표를 두고 있다. 종가의 교육은 성공하는 사람이 아니라 좋은 사람을 만드는데 중심을 둔다. 어머니 뱃속에서, 집안에서, 마을에서 ‘겸손과 배려, 나눔’을 마음으로 새기며 실천하는 인성을 키우는 것이다. 종가의 종훈처럼 겸손과 배려, 나눔을 실천하는 지식인, 그런 선비와 선비정신 좌우명을 삼아 이제부터는 우리 시대에 선비의 삶을 실천해 보려고 한다.

-12간지 다루는 동물민속학자로 알려져 있다. 동물민속학자는 어떤 일을 하는 것인가.

△동물민속은 한국문화 속에 동물들이 역사와 문화 속에 어떻게 투영되어 의미와 상징을 가지는 지를 찾는 연구다. 인간의 동물문화는 참 다양하다. 특히 띠 동물은 한국인의 운명을 읽는 코드다. 정초가 되면 누구나 올해는 무슨 띠의 해이며, 그해의 수호 동물(守護 動物)이라 할 수 있는 십이지의 띠 동물이 지니고 있는 상징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찾아서 새해의 운수를 예점(豫占)하려고 한다. 또한 그해에 태어난 아이의 운명과 성격을 띠 동물과 묶어서 해석하려는 풍속도 전해진다. 새로운 띠 동물의 외형, 성격, 습성 등에 나타난 상징적 의미를 통해 새해를 설계하고 나름대로 희망에 찬 꿈과 이상을 품는다. 한국문화 속에서 동물이 어떤 모습으로 투영되었는지를 밝히면 한국문화 체계 속에서 한국인의 의식 구조를 읽을 수 있다.

-류성룡의 ‘징비록’ 관련 특별전시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는데 박물관은 어떤 역할을 하나.

△30년 이상 박물관에서 근무하면서 가장 깊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박물관은 미래를 꿈꾸는 상상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박물관은 자연, 역사와 문화, 과학의 과거 현재 미래를 이어주는 공간이다. 미래는 창의력과 상상력이 지배하는 사회다. 어릴 때부터 창의력과 상상력을 키울 수 있게 많은 것을 경험하고 탐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박물관이 바로 그 상상력의 주춧돌이 되는 곳이다. 몇천 년 전의 조상들과 만날 수 있고, 지금도 흉내 낼 수 없는 찬란한 문화유산이 가득하다. 박물관에서 경험과 추억은 틀림없이 풍성한 미래를 꿈꾸게 만들 것이다.

-코로나19 역병 위기와 박물관이 어떤 관계가 있나.

△최근에 저의 관심은 자연, 환경에 대한 것이다. 박물관은 기후재앙이라는 전 지구적 위기 상황 속에서 고전적인 의미를 넘어서는 새로운 역할수행을 요구받고 있다. 2017년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린 ‘쓰레기 전시’를 통해 인간 문화에서 버린 모든 것이 얼마나 인류의 환경과 미래를 위협하는지를 가늠해 보았다. 진시황도 결국 못 찾았던 불로장생의 영약은 오늘날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스티로폼 물질로 나타났고, 18만 년을 산 ‘삼천갑자 동박삭’보다 더 오래 사는 유리<2219>플라스틱<2219>비닐 등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신 십장생이 새롭게 등장했다. 코로나 역병의 원인도 치유와 극복도 자연환경의 회복에 찾아야 한다. 인류, 동물, 식물 등 자연생태의 건강성 회복을 위해 박물관의 역할이 필요하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바람이 있다면.

△우선 포항을 많이 알고, 체험하겠다. 신라 천년의 경주에 가려서 포항의 역사문화는 경주 또는 신라에 종속적 문화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러한 것도 역사적 사실이지만 포항지역의 역사와 문화재, 문화의 자료가 많고, 그에 대한 체계적이고 꾸준한 연구가 필요하고, 이것을 이끌 수 있는 연구소나 연구기관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문화가 힘인 시대에 포항도 좋은 문화들을 잘 이어가서 새로운 문화 콘텐츠도 만들고, 그래서 세계적인 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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