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 해자 정비 재현 조감도. /경주시 제공

월성은 마립간기가 개시되는 4세기 중엽(내물마립간·356~402년) 전후에 왕궁으로 건립되어 신라 멸망 때까지 명맥을 유지한다. 신라 왕족 및 귀족, 관료들이 600여 년 동안 궁중 생활을 지낸 기나긴 세월이 월성에 남겨져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월성에 대한 발굴조사는 최근에 들어 본격화되는 단계라 아직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없고, 월성의 축조 시점이 문헌 기록(101년·파사왕 22년)보다 250년 정도 늦춰진다는 사실만이 확인됐을 따름이다.

다만, 부분적이나마 신라 왕궁 역사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것이 있으니 바로 월성 성벽에 인접한 해자다.

해자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을 일컫는다. 성벽에 부속된 방어 시설로 취급되며, 출토 유물 또한 물길에 휩쓸리거나 인근에서 폐기된 것으로 간주돼 학술적 중요성이 부각되지 못했다.

하지만 월성 해자는 기존 인식을 완전히 바꾸는 계기가 됐다.

해자의 면적은 고구려, 백제, 가야 왕궁의 것에 비해 2~3배 이상 넓었고, 퇴적된 토사의 깊이는 2.5~3m에 달했다. 그리고 신라 월성의 해자만이 삼국~통일신라시대라는 오랜 기간을 거치면서 그 기능이 방어, 배수 구조물에서 조경 시설로 변화됨이 확인된 것이다.

해자 조사의 발굴 연혁을 보면 월성 성벽이나 내부 궁궐과 달리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간헐적이긴 하지만 꾸준히 진행됐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중요 사적지인 월성을 처음부터 본격적으로 발굴조사하기에는 부담됐기 때문에 그 주변 일대부터 순차적으로 진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한 까닭에 1984~85년 1차 시굴조사, 1985~89년 2차 발굴조사, 1999~2006년·2007~2009년 3차 발굴조사, 2015년~현재까지 4차 발굴조사로 마무리되고 있다. 특히, 4차 발굴조사는 월성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성벽, 내부 궁궐 조사도 함께 진행 중이며, 융복합 연구를 위한 고환경팀, 문헌팀 등을 포함해 조사단을 꾸려 혁혁한 성과를 매년 선보인 바 있다.

이렇듯 월성 해자는 꾸준한 조사 성과를 통해 삼국 통일을 기점으로 삼국시대 수혈 해자(구덩이를 파서 만든 해자)와 통일신라시대 석축 해자(석재로 만든 연못형 해자)로 구분됨이 밝혀졌다.

수혈 해자는 최초에 월성 성벽의 북쪽 방면으로 너비 25~45m, 깊이 1~1.2m의 구덩이를 굴착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 다른 왕궁의 해자가 10~15m 정도의 폭을 지닌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대규모 면적으로 축조됐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설계의 배경에는 홍수 범람이나 지하수 용출에 취약한 지형 조건이 고려됐으며, 대규모 해자를 활용해 적군을 막기 위한 방어 기능뿐만 아니라 유로를 통제하는 배수 기능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수혈 해자는 한 차례 보수, 정비가 이뤄지는데 해자 너비-면적 차이가 특정 구간별로 극심한 데서 발생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따른 조치로 해자 바닥을 다시 굴착해 높이가 1.2~1.5m에 달하는 목제 판자벽 시설을 25~30m의 폭을 유지하게끔 설치한다. 이런 대대적인 토목 공사를 통해 건기, 우기에 상관없이 배수량, 유로 흐름의 관리를 효과적으로 끌어낼 수 있었고, 비슷한 시기에 행해진 제의 절차로 배, 방패 모양의 의례 목제품이 출토돼 주목을 끌었다.

장기명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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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예연구사

월성 해자는 삼국 통일을 맞이하면서 또 한 번 큰 변화를 겪는다. 해자는 외부의 위협이 낮아지면서 방어 기능을 축소하는 대신, 석축 원지(苑池·관상용 연못)로 개축해 조경 시설로서 새롭게 단장됐다. 조경 시설로 거듭난 석축 해자는 6개의 석축 원지가 중간 지점마다 설치된 입·출수구를 통해 물이 흐르도록 설계됨으로써 월성 왕궁의 북편 일대가 운치 가득한 정원 단지로 느껴지게끔 조성됐다.

현재 경주 관광 명소로 유명한 안압지 또한 동궁에 부속된 석축 원지로서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져 당시 ‘월지’로 불리었고 월성 석축 해자의 축소판과 같은 모습을 띤다.

이후 석축 해자는 2~4차례 개축되면서 전체 면적이 대폭 축소된다. 석축 해자가 줄어들면서 확보된 공간에는 관청 건물이 일렬로 늘어서 채워졌다. 이런 변화의 이면에는 삼국 통일의 물질적 풍요로움을 만끽했던 풍류를 넘어 국정 운영의 현실적 고충이 우선시된 배경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또 당시는 월성 왕궁뿐만 아니라 신라 왕경 전 구역이 도시 개발의 절정기에 도달하면서 전반적으로 중요한 건축물들이 확장되고 개축되는 시기를 지나가고 있었다.

신라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후, 천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흘렀다. 현재 월성 해자에서는 천년이란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려, 그 안에 담겨진 600여 년 간의 신라 왕궁 흔적을 흙 속에서 찾고 있다. 역사의 물길이 흘러 퇴적된 흙 속에는 소그드인(실크로드로 교역한 중앙아시아 유목민)으로 추정되는 토우, 국가 주도 토목 공사에 의한 징발령이 적힌 목간, 고대에 수풀을 이뤘던 나무, 식물 등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머지않아 해자에 대한 발굴조사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지만, 흙 속에서 찾은 유물과 고환경 시료는 지속적으로 분석돼 신라 왕궁 생활을 다각도로 밝혀줄 것이라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