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래 <br>수필가·시조시인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매년 4월 23일은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이다. 국제출판인협회가 스페인 정부를 통해 유네스코에 제안한 ‘책의 날’에 러시아 공화국이 제안한 ‘저작권’의 개념을 포함하여 28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제정하였다. ‘역사적으로 인류의 지식을 전달하고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존하는데 큰 역할을 해온 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도서의 보급이 직접적인 독자뿐 아니라 문화적 전통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발전시키고 이해, 관용, 대화를 기초로 한 사람들의 행동을 고무시킨다는 점을 인정하여서’라는 취지다. 이를 계기로 유네스코는 전 세계적으로 독서, 출판을 장려하고 저작권제도를 통해 지적소유권을 보장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금이야 각종 지식과 정보를 저장하고 전달하는 여러 수단들이 획기적으로 발전했지만, 유사 이래 수천 년 동안은 책(문자)이 그 역할을 전담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마디로 책이 없었으면 인류의 문명은 수천 년 간 답보상태를 면치 못 했을 것이다. 나 역시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이 일반화되기 전까진 지식과 정보의 대부분을 책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달력을 보다가 23일이 ‘세계 책의 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서가를 둘러보며 이런 저런 감회에 젖게 된다.

서재로 쓰는 작은 방을 가득 채운 책들 중에서 희귀본이나 값나가는 책은 하나도 없지만 대부분 손때가 묻어 정이 가는 것들이다. 세계대백과사전과 한국어대사전, 세계의 명화 전집을 비롯하여 동서고금의 사상전집과 문학전집 같은 전집류가 절반가량이고 나머지는 수시로 사 모은 단행본들이다. 그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여섯 권짜리 한국수상문학전집이 있다. 당시엔 끼니를 잇기도 어려운 형편이었을 텐데 여간 큰맘을 먹은 게 아닐 터이다. 권당 단가가 650원이니 전질의 값은 그때 내가 살던 골방의 일 년치 방세와 맞먹는 금액이었다. 결국엔 포기를 하고 말았지만 본격적으로 소설공부를 해 보겠다는 각오가 제법 굳었던가 보다.

비좁은 방에 다 들여놓을 수 없어 종이 박스에 담아 베란다에 쌓아둔 책도 적지 않다. 오래된 문예지가 대부분인데 이사할 때 버리려다가 차마 그러지를 못하고 가져온 것이다. 누렇게 색이 바랜 책들 어느 페이지나 군데군데 밑줄이 쳐져 있어 마치 내 삶의 흔적들을 보는 것 같아 가슴에 아릿한 것이 치밀곤 한다. 현대문학, 문학사상, 한국문학. 시문학, 심상, 실천문학, 문학과 지성, 창작과 비평, 소설문학, 문예중앙 같은 월간지나 계간지들이다. 정기구독을 하지 않고 서점에 가서 직접 구입을 한 것은 달마다 한 번씩 서점 나들이를 해서 이것저것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어느 책이나 뽑아서 펼치면 지은이의 생각과 감정, 의지와 열정을 만날 수 있다. 나는 날마다 동서고금의 수많은 철인, 문인, 예술가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어찌 섣불리 어쭙잖은 편견이나 아집 따위에 빠져들 수 있겠는가. 책을 뒤지기보다는 인터넷 검색을 하는 편이 훨씬 쉽고 효율적인 세상이지만, 비좁고 불편한대로 죽을 때까지 책과 함께 살 생각이다. 나에겐 나날이 책의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