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문경수필가
배문경
수필가

창밖으로 황룡사지(皇龍寺址)가 보인다. 드넓은 터에 청보리가 파도처럼 출렁거린다. 커피를 한잔 들고 밖으로 나오니 가슴이 탁 트인다. 너른 들판과 나지막한 산자락으로 하늘이 높게 보인다. 그 아래 80여m 높이의 탑과 불국사의 여덟 배 크기의 절이 있었다니 그 크기를 상상하기 힘들다.

들어서는 길은 보도블록을 깔아두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으라고 네 개를 깔고 중간은 비워두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간격이 필요한 것인지, 바람이 지나가는 길인지, 자전거라도 지나다니라는 길인지 길게 뻗어있다.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만들어진 구층 목탑과 사대(四代)의 왕을 거치며 완공된 황룡사는 지금 주춧돌과 초석만이 남아 그 규모를 떠올리게 할 뿐이다. 보리밭 중간쯤에 있는 당간지주가 긴 세월을 덩그러니 지킨다.

살살 불어오는 바람이 당간지주 구멍을 지나 세월에 닳은 풍탁소리 들려주는 듯 아련하다. 둔덕으로 오르자 금동 장륙존상이 있던 돌 좌대가 남아있다. 부처님의 실제 크기인 5m 정도로 만든 부처상이 세워졌던 곳이다. 화성 솔거(率居)의 금당벽화가 이곳 어디쯤 있었을 것이다. 먼 이야기 속, 그가 그린 노송에 새들이 날아와 앉다가 부딪혀 어질어질했다지. 자장과 원효가 강설했을 강당도 이 어디쯤 있었을 것이다. 자장이 보살계본을 강설하자 일주일간 감로운무(甘露雲霧)가 내렸다고 전한다.

몇 년 전, 이 자리에서 환한 세상을 본 적이 있다. 한창 자란 풀에 발길이 얽히고 사위는 어둑했다. 개구리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달빛은 교교했다. 친구는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이곳에 한 번씩 온다며 나를 꼬드겼다. 보름달 보며 울부짖는 여우냐며 놀렸지만 걸어 들어서는 길이 달빛을 받아 온통 하얗게 빛났다. 천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 찬란한 역사의 신라 사람이 된 묘한 느낌이었다. 탑돌이를 하던 선덕과 지귀를 떠올리고 여러 왕을 모신 미실이 떠올랐다. 큰 돌에 앉아 달빛을 받으며 삶의 고달픔이며 모래알 같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들을 두런두런 나누었다. 점점이 피어오르던 시간의 무게가 어둠살을 키웠고 둥근 달만 두고 그림자를 지우며 우리도 일어섰다.

황룡사 9층 목탑을 언제쯤 볼 수 있을까. 문화사학자 유홍준은 우리의 기술과 나무로는 황룡사 9층탑을 재현하기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고 했다. 지금 십분의 일로 축소한 탑조차 몇 년이 소요되었다. 그래서 홀로그램 같은 기술로 허공에 빛을 쏘아 탑을 만들면 어떨지 제안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철저한 고증으로 원래의 모습을 재현했으면 좋겠다.

빈터를 걷는다. 신라의 궁궐을 지으려다 황룡이 나와 절이 된 황룡사를 생각한다. 신라의 중심이었을 이곳에서 빛났던 탑을 고려의 김극기가 노래했다. “층층다리는 빙빙 둘러 허공에 나는 듯하고 수많은 산과 물이 한 눈에 트이네. 돌아보니 동쪽 도읍의 많은 집들이 벌집과 개미구멍처럼 아련히 보이네” 아쉬운 마음이 절로 든다. 27층 건물 크기의 탑 꼭대기에 올라 손을 뻗으면 별과 달에 닿지 않았을까. 왕이 살던 반월성과 왕자가 살던 동궁과 월지에서 바라보면 탑은 십자성처럼 빛나며 신라를 지켜준다고 흐뭇했으리라. 성덕대왕신종보다 네 배나 무거웠다는 종소리가 신라를 덮고 더 넓게 중국에까지 울려 퍼지지는 않았을까.

우리에겐 상상의 힘이 있다. 기도라는 것도 상상으로 무한한 것을 유한한 것으로 만들어내는 힘이다. 그리고 여백은 무한한 가능성이다. 한 마리 새가 날개를 편다면 그 공간은 새가 날아가리라는 무한 공간이 만들어진다. 황룡사지를 거닐며 저마다의 상상으로 자신만의 절을 짓는다면 그 또한 허물어진 내 마음 속의 절을 복원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탑곡 마애불상군의 구층탑이 음각으로 새겨진 것을 보고 나는 ‘절없는 절’이라는 글을 썼다. 바위 위에 음각으로 새겨진 탑과 절이지만 상상의 탑과 절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림은 마음속의 그리움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마음속의 것을 정을 두드려 새기면 석가탑이나 다보탑처럼 탑이 되고 남산의 마애불상이 된다. 붓을 들고 채색을 한다면 그것은 탱화가 되고 단청이 된다.

황룡사지는 어느 때보다 무한한 상상이 빚어낸 탑으로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