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명 희

흠칫 놀라 그새 잠잠해지는

밑둥만 남은 무논을 그저 바라보는 일이다

잘린 벼 밑둥 사이로 숨어버리는

번득한 못물의 흔들림을 가슴에 그대로 안는 일이다

한때는 빼곡하게 채워져 넘쳤을

황금빛 출렁임 스러져 다음 생을 기다리는

무논을 그저 안고 가는 일이다

벼를 다 수확하고 난 뒤의 허허로운 무논 벌판을 바라보는 시인은 사랑에 대해, 생에 대해 생각하고 있음을 본다. 황금벌판의 충만함이 저렇듯 쓸쓸한 빈 들판으로 바뀌듯이 우리네 아름다운 사랑도, 젊고 풍족하고 당당하고 의욕적인 성취의 시간이 지나면 낡아가고 비워지고 떠나버리는 허허로운 시간이 찾아오고, 다음 생을 기다리는 것이라는 시인의 관조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