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래 <br>수필가·시조시인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이 땅 어디나 민들레의 영토 아닌 곳이 없다. 갓털(冠毛)을 달고 날아올라 흙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정착해 꽃 피우는 민들레는 누가 뭐래도 이 땅 이 봄의 주인이다. 만화방창 온갖 꽃들과 신록이 저마다 제 영토임을 주장하지만 민들레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시멘트 옹벽 틈새든 시궁창 옆이든 가리지 않고 환하게 꽃을 피운다. 해바라기처럼 큰 키를 갖지 못한 앉은뱅이 꽃이지만 해바라기보다 더 꼿꼿이 해를 쳐다보며 피는 꽃이다. 흔하디흔한 꽃이지만 세상 어떤 꽃보다 밝고 확실한 존재감으로 자족하는 꽃이다.

제비꽃은 이름도 많고 종류도 여러 가지지만, 자주색 꽃이 제일 많고 제비꽃이란 이름과도 잘 어울린다. 민들레처럼 씨앗을 바람에 날려 보낼 수도 없고 누가 옮겨 심는 것도 아닌데 널리 퍼져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놀랍다. 작고 흔한 야생화지만 시골 학교에 전학 온 도시 계집애처럼 어딘가 새초롬한 데가 있다. 꽃이 지고 씨방이 여물면 그 안에 자잘한 씨알이 들어있다. “ - 덜 여문 건 하얀 쌀밥/ 다 여문 건 누런 보리밥/ 배고파 칭얼대는 어린 동생 풀밭에 내려놓고/ 아홉 살 누이가 보여주던 제비꽃 도시락” - 졸시 ‘제비꽃’중에서

비싼 돌과 나무로 조경을 하고 잔디를 깐 정원에는 민들레도 제비꽃도 골칫거리 불청객 잡초일 뿐이다. 방치를 했다간 얼마 못 가서 그들이 제 영토를 주장할 터이니 품삯을 주고서라도 일삼아 뽑아낸다. 그러나 여기, 민지네 집에는 그런 차별이 없다.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 살 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을 비비고 일어나/ 말없이 손을 잡아끄는 것이었다/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정희성 시인의 ‘민지의 꽃’이라는 시다. “꽃이야”하는 다섯 살 배기의 한 마디가 40여 년 시를 써온 시인의 입을 다물게 한다. 언어의 달인이라 할 시인의 말문을 막히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시인은 그것을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라고 한다. 시란 이렇듯 천지를 움직이고 귀신도 감동시키는 말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온갖 현란한 말재간도 이 한 마디 앞에서는 무색한 군더더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꽃과 잡초를 구별하는 따위의 분별지(分別智)로는 천지와 소통할 수가 없다. 인간들이 언어로 쌓아올린 온갖 인식체계가 실은 유치원 어린아이의 수준에도 영 못 미치는 예를 흔하게 본다. 예수님도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지 않아서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했다. 난삽하고 황당한 허위의식으로 점철된 비문(非文)들을 마치 고도한 정신세계의 표출인 양 호도하는 논리들에 현혹되는 세태에도 민지의 말이 필요할 것 같다. “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