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규열 한동대 교수
장규열 한동대 교수

말 속에는 그늘도 있다. 영화 ‘미나리’에서 할머니역을 해낸 배우 윤여정 선생. 할리우드 오스카상 시상식에 참석할 터에, 그의 아들이 미국사회에 만연한 ‘아시안 혐오분위기’를 떠올리며 걱정을 하더란다. 미국이 어쩌다 저렇게 되었을까. 사람들 사이에 골이 패이고 벽이 생기면 대화와 소통이 사라지고 화합과 상생은 꿈도 꾸지 못한다. 흑인과 백인들 사이에서 있었던 갈등과 차별이 어느새 아시안들에게도 옮겨온 듯하다. 닮은 걸 보고 서로 보듬기보다 다른 걸 굳이 드러내 미워하려 드는 건 혹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우리는 어떤가. 뿌리깊은 영남과 호남의 갈등, 최근에 드러난 성별 간 논란, 선거 때마다 주목되는 세대간 차이.

영화 ‘미나리’가 미국 내 아시안이 겪는 좌절과 극복을 그렸다면, 영화 ‘기생충’은 우리 사회 안에 숨어있는 계급과 구조를 다뤘다. 두 영화 모두 세계영화계의 주목을 받는 걸 보면, 스토리텔링의 힘과 성공이 느껴지면서도 사회적 구조가 모두에게 던지는 그늘을 확인하면서 한편 씁쓸하지 않은가. 미움과 반목이 남들 얘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이었다니! 미국 인종갈등에 아시안혐오가 더해졌듯이 우리 사회엔 20대와 30대가 던지는 경고등이 눈이 부시게 들어왔다.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던 시점에 모두를 놀라게 하는 청년들의 분노. 그를 통해 패배를 삼킨 여권은 물론, 승리를 거머쥔 야권도 경악한 나머지 그리 호쾌한 반응을 보이지 못한다. 자, 이제 새롭게 등장한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갈 참인가.

이념이 달라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현실에 밝고 실용에 뿌리를 둔 그들의 시선을 찬찬히 따라가 보아야 한다. 가르치려 하기보다 배워야 하고, 말하려 하기보다 들어야 한다. 젊은이들이 만들어낸 또 다른 갈등구조로 여기기보다 한 세대의 성난 몸부림으로 해석해야 한다. 진보도 보수만큼이나 기득권력이 되어버린 지금, 참신하게 등장한 경보등이 아닐까.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라는 경고장이며 그래도 혹 남아있다면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거부권이다. 진보가 들어선 미국에 생각거리가 많아진 만큼, 보수가 이겨버린 한국에도 걱정거리가 태산처럼 높다. 인종 간 갈등이야 경계선이 눈에 보이지만, 세대 사이에 들어선 가림막은 구분선이 모호하다. 투표로 드러나기 전까지는 누구도 몰랐으니까. 소통과 화합은 이제 더 멀어진 것일까.

통찰과 혜안은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드러나는 법이다. 지혜와 명철도 위기를 만날 때 번득인다. 이념을 고집하기보다 실용으로 나서야 한다. 이론보다 현실에 도움이 되도록 결정해야 한다. 젊은 세대들이 일상으로부터 용기를 회복하도록 지지해야 한다. 꿈과 용기만 있어도 성공에 이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어야 한다. 세상만 바뀐 게 아니었다. 사람이 더 많이 바뀌었다. 그들이 당신을 지지하려면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생각해야 한다. 미움과 갈등으로 가득한 세상에 ‘청년’이 열쇠로 등장하였다. 누가 젊은이의 마음을 획득할 터인가. 청년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