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손경찬의 대구·경북人
이진숙 전 대전 MBC 사장

이진숙 전 사장은 경험을 통해 어떤 일이건 결코 우연만으로 일어나는 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이진숙 전 사장은 경험을 통해 어떤 일이건 결코 우연만으로 일어나는 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예전 어느 때에 걸프전의 전시 상황을 알리는 목소리를 들은 적 있다. 앳되고 귀염성 있는 여기자가 바그다드의 현지 상황을 알리고 있었다. 총을 든 군인과 폐허가 된 도시 정경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갔다. ‘저 동네는 뭔 일로 저렇게 주야장천 총질을 해대는지.’ 혀를 차는 노인의 말에 마주앉아 막걸리를 마시던 그의 친구가 말을 받았다. ‘땅만 파면 기름이 나오니 그놈을 믿고 힘자랑 하는 거지.’ 책 읽으며 먹을 과자 한 봉지 사들고 가게를 나왔다. 바그다드에서 누가 어떤 이유로 피를 흘리며 싸우건, 6·25를 겪은 두 노인에게 전쟁이란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고 몸서리치는 것이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꿈인 듯 그 여기자가 내 앞에 앉아 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모습으로. 그녀가 바로 한국의 여성 종군기자 1호인 이진숙이다. 종군기자와 대전 MBC 사장이라는 직함까지 다 내려놓은 지금, 그녀는 한껏 자유롭고 여유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문득 궁금해진다. 그녀가 화약고 같은 중동지역에 들어간 것이 자의적인지 타의적인지.

 

지도를 보며 키운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세계 곳곳으로 뛰어다니고 싶었던 그녀의 바람을 이루어주었다.

야세르 아라파트라는 인물에 대한 궁금증으로 시작된 중동 역사 공부가 마침내 그녀를 바그다드로 날아가게 했다.

100%의 진실과 1%의 진실이 늘 그 가치대로 생산되는 게 아니어서 방송이 존재하는 한 갈등이 끊이지 않을 테지만, 그런 인고의 시련 자체가 진실에 접근하는 방식이 아닐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잖아요.”

“그때는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한 시대가 격동적으로 흘러갔다고 정리되는데 그 선택을 할 때는 그것이 꼭 해야 할 일이었다고 한다. 1990년 8월2일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때, 친하게 지내는 선배가 “중동 잘 알지?” 하며 그녀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전 세계의 취재인파가 중동으로 몰려갈 때여서 비자 받기가 어려웠는데 총영사가 들어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여성으로서 전쟁취재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꿈도 꿀 수 없는 시절이었다. 중동 관련 세미나에 참여하며 세계정세를 익힌 노력이 현실로 다가오니 “가슴이 뛰었어요.” 세상은 준비된 자의 것이라든가. 죽을지 살지 모르는 혼돈의 중심으로 들어가며 가슴이 뛰었다는 말이 신선하게 들렸다.

“어떻게 해서 전쟁취재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학교 다닐 때부터 중동 문제에 관심이 많았어요.”

영어에 대한 관심으로 먼 중동까지 가게 된 것을 그녀는 운명이라고 했다. 영어가 좋았고 세계지도를 보는 게 좋았다고. 세계에 대한 관심, 넓은 세계로 뛰어들고 싶다는 욕구가 이 전 사장으로 하여금 영어공부에 몰두하게 했다. 지도를 보며 키운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세계 곳곳으로 뛰어다니고 싶었던 그녀의 바람을 이루어주었다.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교사생활까지 했지만 영어공부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고 한국외대 영어통역 석사과정을 밟았다. 그 후로도 영어에 대한 욕구를 따라서 존스홉킨스대학 공공정책학 석사 과정과 서강대 정치학·언론학 석사 과정을 다 거쳤다. 영어가 그녀의 발전에 불씨가 되어주었다.

“중동에 왜 그렇게 끌렸어요?”

“야세르 아라파트라는 인물 때문입니다.”

군복을 입고 격자무늬의 터번을 감은 사람이 훤히 떠오른다. 티브이에 자주 비치던 중동지역의 남자들 모습이 그랬다. 이 전 사장은 아라파트라는 사람이 궁금하더라고 했다. 야세르 아라파트는 당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의장이었던 사람이다. 주요인물 납치, 비행기 납치, 수많은 테러를 저지르며 평생 동안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과 외교적 노력으로 1994년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정을 체결하고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인물이다. 인물에 대한 궁금증으로 시작된 중동 역사 공부가 마침내 그녀를 바그다드로 날아가게 했다. 생생한 기사를 위해 암만에서 국경을 넘어 바그다드로 잠입한 얘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국경을 넘을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현장취재로 생생하게 쓸 수 있는 기사를 가만히 앉아서 받아쓰는 게 죽기보다 싫었어요.”

2003년 이라크전 때에 그녀는 바그다드에 있었다. 전쟁이 발발할 조짐이 일자 회사는 기자들의 신변안전을 위해 요르단 암만으로 철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분쟁의 중심에서 뚝 떨어진 곳이었다. 암만으로 이동했던 그녀는 휴일 아침에 차를 타고 이라크 국경을 넘었다. 가만히 앉아서 받아쓰는 게 무슨 기자냐, 하는 생각이 모험을 감행하게 했다. 재입국 비자를 받아놓은 덕분에 바그다드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MBC와 어떻게 인연을 맺었어요?”

“인생이란 게 참 우연이에요.”

그녀는 학교 부근에 방을 얻어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분식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티브이 시청 중에 MBC에서 사원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떴다. ‘바로 저거다!’ 하는 생각으로 지원을 한 것이 방송기자 생활의 시작이었다. 기자생활을 하겠다는 계획도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출발이었다. 당시만 해도 수습기간이란 게 있어서 훈련에 적응하는 6개월이 매우 힘들었다. 새벽 4시에 나와서 밤 한 시가 넘어야 집으로 가는 일상의 반복은 말할 것도 없고, 애써서 쓴 기사를 퇴짜 맞고 다시 쓰라고 야단맞을 때 눈물 나게 힘겹더라고 했다.

“쓰고 싶은 기사와 쓰고 싶지 않은 기사로 갈등을 느낀 적은 없는지.”

“쓰고 싶지 않은 기사와 쓰라고 명령 받은 기사 사이에서 겪는 갈등은 기자들이 숱하게 겪는 일인 걸요.”

기사의 종류는 반드시 나가야 할 기사, 나가도 안 나가도 그만인 기사, 나가서 안 될 기사로 구분되는데 윗사람과 갈등이 일어나는 것도 그런 일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일로 싸운 적도 있고 꾸중도 많이 들었지만 지나고 나서 보니 방송뉴스의 다변성을 이해하겠더란다. 정치, 경제, 사회, 스포츠, 흥미 위주의 기사까지, 층마다 관심이 다른 시청자들을 골고루 충족시키기 위해 다양한 스펙트럼을 짜는 과정 자체가 그대로 전쟁의 연속이다. 시간이 흐르고 여러 겹의 경험이 쌓이고 나서야 비로소 방송의 속성을 알겠더라고. 선후배 사이에서 일어나는 그런 갈등 역시 조율의 단계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상에 불과하다고 했다. 100%의 진실과 1%의 진실이 늘 그 가치대로 생산되는 게 아니어서 방송이 존재하는 한 갈등이 끊이지 않을 테지만, 그런 인고의 시련 자체가 진실에 접근하는 방식이 아닐지.

“삶 자체가 롤러코스터였네요.”

“돌이켜보면 롤러코스터였는데, 취재에 열중하던 시기에는 위태로운 삶을 산다는 생각보다 그저 눈앞에 닥친 일에만 골몰하게 되더군요.”

걸프전, 이라크전, 언어연수를 겸한 시간까지 바그다드에 머물렀던 시간이 1년 5개월 정도라고 한다. 전쟁으로 인해서 그곳의 역사와 정치적 상황을 더 깊이 알게 되었다며, 종교지도자가 대통령보다 더 큰 실권을 잡고 있는 나라의 순종적인 풍습 속에서, 민주주의가 나라에 따라서 달리 해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새로이 깨달았다고.

“지금이 이 전 사장님에게 어떤 시기인가요?”

“새로운 도약을 위한 준비기간이라고 할까요?”

운명이 그녀를 또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 없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은 어떤 일이건 결코 우연은 없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녀가 살아온 모든 시간이 지금부터 가려고 하는 곳에 닿기 위한 준비 기간일지도 모르겠다며, 그녀는 그 새로운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었음을 슬쩍 내비쳤다.

“가장 잘 살았다고 여겨지는 시기가 언제예요?”

“딸을 낳았을 때요.”

살아온 중에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 있느냐니까 바그다드를 거론한다. 당시 스물아홉이었던 그녀가 활동한 곳이 바그다드였다고. 영화 ‘바그다드 카페’가 떠오르며 ‘낭만’이란 단어가 비눗방울처럼 몽실몽실 피어오른다. 그곳에 가보지 못한 나도 이렇게 그리운데 가본 사람은 얼마나 더 그리울까. 바그다드는 ‘천일야화’의 무대다. 280여 편이나 되는 긴 이야기 중의 하나인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을 만들어낸 도시. 이름만으로도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그 도시가 그녀에게는 제 2의 고향으로 생각될 정도란다.

티그리스강을 보면 반드시 이라크로 돌아온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시가지의 정경이 아름답다고 한다. 무타나비 시인의 이름을 딴 무타나비거리, 술을 좋아했다는 아부누아스 시인의 이름을 딴 아부누아스거리, 팔레스타인거리를 줄줄이 엮어낸다. 그 낭만 뒤에,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얼른 총부터 쏘고 보는 살벌함이 서려 있다 해도 바그다드의 존재감은 조금도 상실되지 않는다. 그게 바로 그 도시가 지닌 역사의 힘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하나를 든다면?”

더우면서도 건조한 5월에 바그다드 호텔에 묵었는데 팔레스타인 기자가 길을 안내하며 시를 읊어주던 일과 손가락이 델 정도로 뜨거운 차를 후후 불어가며 마신 기억을 들었다. 전쟁의 분화가 스쳐간 곳에서. 무타나비거리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장이 서는 거리시장에서 숯불로 끓여낸 차를 마시며 낭만을 즐겼다고. /글 장정옥 소설가

(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장정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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