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유적지 분포를 보여주는 지도.
경주의 유적지 분포를 보여주는 지도.

신라왕경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완만한 경주 선상지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경주 선상지는 크게 고위면과 중위면, 저위면으로 나뉘며 왕경을 비롯한 유적은 주로 저위면과 중위면에 걸쳐 분포한다.

경주 선상지는 인간이 생활하기 이전, 빙기와 간빙기 때부터 만들어진다. 경주 동쪽에 위치한 산지에서 자갈과 모래가 그 당시 물길을 따라 옮겨져 마지막 빙기가 끝날 때까지 경주 곳곳에 쌓였다. 현재 경주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북천은 사람이 살기 이전부터 물길과 폭을 달리하며 흐르면서 옛 지형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추정 할 수 있는 옛 물길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뉘는데 ①현재 북천 하천제방 정비 이전에 흘렀던 물길 ②동천동 전 헌덕왕릉(사적 제29호) 동쪽부터 약산과 금강산을 따라 용강동으로 흐르는 옛 물길 ③보문동 숲머리마을 부근부터 황룡사(사적 제6호)와 동궁과 월지(사적 제18호)를 거쳐 남천과 서천(형산강)으로 이어지는 옛 물길이다.

한편, 문헌기록에 따르면 고려시대 이전까지 알천(삼국사기) 또는 북천(삼국유사)으로 불렸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북천은 경주읍성(사적 제96호) 북쪽을 흐를 때부터 북천이라 주로 불리고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에 쌓은 제방을 따라 만들어진 숲(오리수) 위치로 추정할 수 있다. 고려시대 왕경에서 지방 도시로 전락하고, 몽골 침략 이후 급격하게 쇠퇴해 인구가 줄었던 탓에 현재 북천 남쪽에 있는 전랑지(사적 제88호)와 같은 중요유적은 13세기 후반에서 15세기 후반 사이에 북천 수해로 훼손됐다. 나라에서 경주가 차지하는 중요도가 높았다면 훼손되지 않았거나 바로 복구됐을 것이지만 현재 유적에 남겨진 흔적으로 보아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경주 북천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은 알천이다. 선덕여왕 재위 마지막 해(647년)에 반란을 일으켜 죽은 비담을 대신해서 상대등에 오른 사람 또한 알천이다. 알천은 그만큼 신라와 경주에서 중요한 이름으로 여겨져 왔음은 분명하다.

알천 옛 물길 가운데에는 진흥왕(534~576년) 즉위 이후 가장 중요한 국가사업인 황룡사(553년 창건)가 있다. 황룡사가 창건되기 이전 상황은 의외로 단순하지만 신비롭다.

황룡사가 새로운 궁궐로 계획되다가 사찰로 바뀐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 거대하고 중요한 시설이 지어지기 전 옛 지형과 고고자료는 황룡사 발굴조사가 진전되어, 남쪽 황룡사 광장과 도시유적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경주에서 몇 군데 조사사례가 있는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황룡사 광장과 도시유적 주변에서 확인되지 않고 있어 6세기대에 처음으로 이곳이 논으로 경작된 사실을 알 수 있다. 보통 논은 산간지역을 제외하면 주로 평평하고 물이 적당히 있는 곳을 개발하여 경작하는데 이러한 사실로 황룡사 주변이 북천 또는 알천의 영향을 받는 물이 많은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옛 물길 범위 안에 계획되었던 새로운 궁궐의 건립과 이후 황룡사 창건이 가능하게 된 것은 국가가 주도한 하천 치수사업이 반드시 있어야 가능하다. 황룡사가 지어진 남쪽에서는 옛 물길을 따라 모래와 자갈이 많이 쌓여있는 자연지형을 파서 황룡사가 건립된 사역에 골재로 쌓아 대지를 만든 흔적이 조사됐다. 황룡사 사역에서는 흙둑을 서쪽에 만들어 동쪽부터 서쪽으로 흙과 자갈을 번갈아 쌓은 흔적이 발굴조사에서 확인됐다.

월성(사적 제16호) 북쪽에는 동에서 서로 흐르다가 계림(사적 제19호) 부근에서 급격하게 방향을 바꿔 남천으로 합류하는 인공수로(발천)가 있다. 발천은 신라 시조 혁거세 거서간의 왕후인 알영이 태어나 목욕을 시킨 곳으로 역사기록은 전한다. 현재 석축으로 둘러싸여 폭이 일정한 발천은 선상지를 만들면서 흘렀던 옛 물길이 지나간 낮은 지점에 있다. 자연하천으로 폭이 넓었던 발천은 방향이 바뀌며 인공수로가 되면서 월성 서쪽을 따라 남천으로 합류하게 됐다.

장우영<br>​​​​​​​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
장우영
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

이곳이 개발되기 이전은 자연하천이었고, 역사시대에 하천을 정비해서 인공수로를 만들었던 사실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서라벌문화재연구원,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이 차례로 조사 중인 동부사적지대(사적 제161호) 일원 발굴 결과로 알 수 있다.

발천 옛 물길은 월지와 월성해자에도 영향을 끼쳤다. 동궁을 건설하면서 높게 흙을 쌓고 월지를 만들면서 주변 지하수와 지표수를 이용하여 조경을 염두에 두고 용수를 확보했다. 모래와 자갈로 가득 차 있던 선상지의 옛 물길을 파서 만든 삼국시대 수혈해자도 삼국통일 직후, 동궁과 월지가 만들어지면서 수문환경이 바뀌어 조경 성격이 강한 석축해자 단계로 탈바꿈 한다.

우리가 사는 신라왕경과 경주는 그러한 땅 위에 지어져, 오랜 시간 동안 서울 또는 경도(京都)로 불리게 되는 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자랑스러운 역사도시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