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스타프 카유보트作 ‘파리의 거리: 비오는 날’. 1877년.

미술은 하나의 언어이다. 언어의 일차적 기능은 의사소통이며, 소통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이 공통된 의미체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1850년대를 기준으로 미술은 현대미술과 그 이전의 시대로 구분된다. 여기서 1850년대라는 숫자를 절대 불변의 고정적인 숫자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미술의 변화는 점진적인 변화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났다거나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처럼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 정확하고 분명한 시점과는 달리 이해돼야 한다.

현대미술의 시작점을 1850년대 혹은 범위를 조금 넓혀 19세기 중반으로 보는 데는 큰 이견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미술의 언어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1850년대 이전에 나타난 미술만 하더라도 1천500년 이상의 시간 동안 수많은 양식들이 나타났고, 각각의 양식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19세기 중반에 나타난 미술들은 형식이나 내용이 너무나 다른 것이었기 때문에 그 이전의 미술들이 지니고 있었던 차이점들을 모두 희석시켜 버렸다.

현대미술의 특징은 고전미술과의 비교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서양미술사는 천년의 중세, 르네상스, 바로크, 신고전주의, 낭만주의로 나눠진다. 또한 르네상스와 바로크 사이에 매너리즘이 그리고 바로크와 신고전주의 사이에 로코코가 과도기적 성격을 띠며 잠시 나타나기도 했다. 각각의 시대는 그 시대의 미술을 특징짓는 형식을 보여줬다. 그것을 양식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서양미술사는 중세에서 낭만주의 미술까지 양식에 의해 시대가 구분됐다고 생각하면 된다.

1850년대 이후 미술사의 전개 양상은 전혀 다른 특징을 보인다. 하나의 양식이 짧게는 반세기 길게는 수백 년을 지배했던 과거와는 달리 다양한 형식의 미술이 동시에 나타나면서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세력화되고 권력화 된 미술과 대립하게 된다. 현대미술에 접어들면서 더이상 시대를 지배하는 보편적인 양식은 사라지게 됐고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개인화되고, 개별화된 실험적 미술이 사조, 주의, 운동의 형태를 띠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진행된다. 양식의 시대에서 이즘(ism)의 시대로의 전환, 다양한 미술 형식의 공존, 이것이 현대미술의 중요한 특징이다. 미술은 시대의 상호작용 속에서 숨을 쉰다. 시대가 변하면 미술이 달라지고, 시대의 변화를 미술이 예견하기도 하며, 미술이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도 한다. 그래서 미술을 시대를 비춰주는 거울, 세계로 열려 있는 창문에 비유하곤 한다. 뿐만 아니라 바로 이러한 시대와의 상호작용이 있기 때문에 미술을 사회 문화적 현상으로 탐구하는 미술사라는 학문이 가능할 수 있다.

19세기 중반 현대미술 태동의 중심지는 프랑스 파리이다. 물론 프랑스 파리를 현대미술의 유일한 발상지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프랑스 파리가 현대미술이 시작된 가장 중요한 장소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19세기 중반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현대미술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을까? 19세기 중반 유럽은 정치·사회적으로 대변혁을 경험하고 있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앙시앙 레짐으로 불리는 절대왕정의 구체제가 무너지고 시민사회가 형성되는데 그 중심이 된 곳이 프랑스 파리였다. 산업과 경제구조에도 크나큰 변화가 일고 있었다.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점차 유럽 대륙으로 확산되었고, 산업혁명의 기술혁신은 경제의 중심축을 농업에서 공업으로 옮겨 놓았다. 토지를 기반으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굴뚝에서 연기 나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났다. 도시와 도시가 철도로 연결되면서 이동 속도가 빨라졌고, 이동 속도가 빨라진 만큼 세상이 움직이는 속도도 빨라졌고, 생각의 속도, 변화의 속도도 빨라졌다. 무언가가 빨리 움직이게 되면, 누군가는 그 변화로부터 소외를 당하고 그와 함께 양산되는 어두운 그림자가 사회적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속에서 현대미술이 피어났다.

/김석모 미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