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인의 ‘광염소나타(1929)’

‘광염소나타’는 중외일보에 1930년 1월 1일부터 10일까지 연재되었다. 1월 9일에 실린 이 소설의 9회에는 방화를 저지르는 백성수의 모습이 삽화로 그려졌다.

현대의 가장 뛰어난 전기 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가 채 완성하지 못하고 죽은, 오노레 드 발자크(1799~1850)에 대한 평전이 있다. 이 평전에서 훗날의 위대한 작가 발자크는 불과 스무 살을 갓 넘었을 무렵 이미 가벼운 희극이나 대중적인 취미의 작품들을 쓰면서 가명으로 엄청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알 수 없는 힘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시대를 타고 흐르는 예술의 기운 한 가운데로 나아가 기존 자신이 가명으로 쌓아올린 과거와 절멸하고, 새로운 글쓰기를 향해 나아갔다. 그는 “인간 희극”이라는 대 기획 아래, 인간과 사회에 대한 끝도 없는 탐구에 나서서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고리오 영감’ 등 사회를 해부하는 ‘인간 희극’ 시리즈를 90편이나 썼던 것이다. 시대를 좌우하는 예술의 이념을 찾아보기 힘든 지금 시대라면 결코 불가능할 작업이다. 예술의 환영에 들려 미치광이처럼 골방에 파묻혀 글만 쓰던 낭만적인 문예의 시대는 저 멀리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문학이 예술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광인의 모습을 한 예술의 환영에 홀린 인간들이 글을 쓴다고 밥도 돈도 나오지 않아도 무언가에 이끌려 써갔던 시대를 마지막으로 종언을 고할지도 모르겠다. 문자에서 영상으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어딘가에 누군가는 예술의 환영에 들려 밑도 끝도 없는 창작을 계속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한국 작가 중에서도 이처럼 광인의 모습을 한 예술성에 도취되었던 작가가 적지 않지만, 김동인(1900~1951)만큼 예술성의 이념에 깊이 경도됐던 작가는 또 찾아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비교적 척박한 한국의 근대문학계에서 김동인만큼 자신의 색깔을 가지고 있는 작가는 또 드물기 때문에, 대학의 강의 시간에도 간혹 다루고, 만나는 사람마다 한 번은 읽어보기를 권하는 작가가 바로 김동인이다.

어린 시절 당시의 여느 작가들이나 다름없이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그는 유학생이라면 선택하기 마련인 법학이나 상학을 택하지 않고, 미술을 택해 가와바타 화숙에 들어갔다. 아무리 평양 부호의 자제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의 선택이라고 하더라도 당시로서 미술을 전공하고자 택했던 것은 꽤 대담한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 등 당시 화가들 대부분 선택했던 도쿄미술학교가 아니라 화가의 화숙에 들어간 것 역시 범상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이후 계속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었지만, 1919년 그는 친구인 주요한과 함께 동인지 ‘창조’를 기획해 잡지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조선으로 돌아왔다.

김동인.
김동인.

이후 약 10년 간 소설을 쓰면서 한국의 대표적인 소설 작가로 활동했던 김동인은 1929년에 ‘광염소나타’를 쓴다. 이 소설에서 그는 극단적인 예술성에 사로잡혀 방화와 살인 등 윤리적인 범죄로까지 나아간 미치광이 피아니스트 백성수에 대해 다루고 있다. 예술인가, 윤리인가, 선명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선택지는 한국의 척박한 문학계에서 문학을 통해 예술적 이념을 추구하고자 했던 김동인이 마주칠 수밖에 없었던 예술성의 실체를 드러내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김동인은 한 관찰자의 눈을 통해 백성수의 행위를 담담히, 하지만 안타깝게 지켜본다. 예술성의 환영에 들린 인간들은 대개 같은 표정을 하고 있게 마련이다.

몇 년 째 대학 강의에서 김동인의 이 소설을 학생들과 함께 읽고 있다. 언제나 학생들은 이 작품에서 예술에 홀린 인간의 눈과 사회의 도덕 사이의 문제를 짚어낸다. 물론 해마다 예술성에 경도된 예술가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학생들의 수는 줄고 있다. 작품은 변하지 않았을 테니, 사회가 점차 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김동인도 1930년을 너머 전쟁에 휩쓸리면서 친일의 현실을 선택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예술에 홀렸던 그 많은 광인들은, 이제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홍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