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길수<br>수필가
강길수
수필가

세레나.

또다시 삼월이 왔습니다. 작년 삼월은 정월부터 불어 닥친 ‘코로나19’ 바이러스 전염병에 정신이 홀려버렸었지요. 그 때문에 봄 편지 한 장 못 쓰고 지나갔었습니다. 세레나도 그랬다고요. 아마도 지구촌 모든 이가 그리 살았을 터입니다.

올 삼월에도 자연은 솟아나는 연록 새싹들의 희망으로 가득합니다. 매화, 개나리, 진달래, 목련, 살구, 복숭아, 벚나무가 잇달아 사랑을 꽃피웁니다. 저 낮은 곳에는 하얀 별꽃과 파란 까치꽃들이 앙증스레 봄을 뽐내고 있고요. 한데 우리 사회와 지구촌은 아직도, 마스크를 쓰고 코로나 19 바이러스 전염의 공포와 싸우고 있습니다. 언제쯤 우리는 마스크를 벗어 던질 수 있을까요.

너무 작아 눈에 보이지도 않는 코로나 19 바이러스 병원체(病原體)…. 사람들이 어찌 피하며 살라고, 하늘은 이런 존재들의 생성을 허용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지구란 행성은 생명에게 괴로움과 고통을 주는 도장(道場)으로 설계된 곳일까요. 생명체와 비 생명체의 특성을 다 가졌다는 묘한 존재 바이러스. 숙주의 생체 안에 들어가야만 증식하며 살 수 있는 이상한 병원체 바이러스. 21세기 과학 문명의 사회에서 왜 코로나바이러스 퇴치가 쉽지 않을까요.

세레나.

사람들은 코로나19가, 오고 있는 언택트(untact) 시대를 더 앞당겼다고 말합니다. 이 흐름은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설파한 ‘인간은 폴리스(polis)적인 동물이다’란 정의를 무산시키는 것일까요. 후에 세네카에 의해서 ‘사회적인 동물’로 번역되었다지만, 그 의미는 ‘인간은 공동체적 존재’로 보아도 될 테지요. 얼핏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가 무너졌다 볼 수는 있겠으나, 우리가 누리는 컴퓨터, 휴대폰 등 정보 소통 도구들을 생각한다면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소통 방법만 달라졌지, 공동체로 살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의 존재 방식이 달라진 것은 아닐 테니까요.

바이러스가 생체에 기생하듯, 생명도 자연에 기대어 삽니다. 또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사람 몸에 붙어살듯 인간은 자연에 기댈 뿐 아니라, 공동체에도 참가해야 삽니다. 올 삼월엔, ‘사회적 거리 두기’로 대표되는 ‘언택트 시대’란 명제가 제 앞에 턱 버티고 서 있습니다. 산골 농가에서 태어나 자라며, 사람에게는 친 생태계의 본능이 있음을 체험했습니다. 당시 농사는 완벽한 자연 순환형 농법이었으니까요. 한데 왜, 그 인간이 이룩한 물질문명 사회가 오늘날 기후변화, 생물 종의 감소, 사스나 코로나 19 바이러스 등의 병원체 발생, 전염과 같은 자연의 역습을 받는 처지가 되었을까요.

컨택드(contact) 시대의 개인이 흙 입자라면, 언택트 시대의 개인은 모래 알갱이라 볼 수 있겠지요. 흙과 모래의 결속력을 따진다면 당연히 흙이 강합니다. 그러나 모래가 시멘트와 물을 만나면 콘크리트가 되어, 그 단단함은 구운 흙벽돌과도 견줄만할 것입니다. 어쩌면 언택트 시대의 가능성이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언론 매체와 컴퓨터, 휴대폰 등 사회의 소통 도구와 방법들을 물과 시멘트의 용도로 쓸 수 있도록 인간이 지혜를 모은다면 말입니다.

세레나.

보도 가에 때 이른 작은 해님들이 삼월을 밝힙니다. 해님들은 머지않아 하얀 갓털 송이로 변신하여 봄바람을 기다릴 것입니다. 이윽고 명지바람 남실남실 불어오면 갓털은 씨방을 모시고 날아, 새 땅에 새 민들레로 태어날 테지요. 기후변화에 곧바로 대응하는 민들레가 거룩해 보입니다. 식물이 생태환경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며 살아내는 모습을 보노라면,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듭니다. 코로나 19로 얼룩진 두 번째 삼월을 하릴없이 삽니다. 웬일인지 올핸 새싹에 눈길이 더 갑니다. 철 이른 새싹은, 식물이 살기 위해 우리가 모르는 소통과 결정으로 변화하는 기후와 환경에 대처한 결과가 아닐까요. 정부가 강제한 ‘거리 두기’, ‘비대면’, ‘백신 접종’ 부작용 등이 사람을 우울하게 합니다. 하지만, 언택트 시대로 가는 훈련이라 여기며 새싹처럼 대처하려 합니다.

또다시 온 삼월, 연록 새싹들의 생명 찬가가 온 누리에 메아리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