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고분과 가야의 고분들.

지금으로부터 1천600여 년 전후부터 만들기 시작한 신라·가야의 대형 봉토분(또는 고총고분·高塚古墳)은 위치, 모양, 무덤 구조, 시신과 부장품을 놓는 공간, 봉토를 쌓는 방법 등이 달랐다.

신라의 수도인 경주시내에는 천마총, 황남대총이 있는 대릉원과 주변 쪽샘유적 등에 넓은 고분군이 조성되어 있다. 신라 왕과 귀족들의 공동묘지인 셈이다. 현재는 평지이지만, 고분을 만들 당시에는 크고 작은 하천과 늪지가 있었고, 이를 피해 봉토분을 만들었다.

대구, 경산, 의성, 상주 등 신라권과 부산, 창녕 등 신라·가야의 접경지, 고령, 합천, 함안, 고성, 산청, 남원 등 가야권의 봉토분은, 대체로 구릉이나 산의 능선 위에 만들어져 있다. 무덤 주인공의 신분이 높을수록 능선의 정상이나 끝자락에 커다란 봉분을 쌓았다. 봉분 안을 발굴하면, 주인공이 묻힌 무덤과 주변으로 흙, 돌 등을 여러 방법과 순서로 쌓은 모습이 드러난다. 특히 무덤의 구조와 만든 방식은 고분과 고분군을 만드는 사람들의 장례문화를 가장 잘 보여준다.

경주는 덧널(목곽·木槨)을 2~3중으로 만들고 그 안에 시신을 안치한 관을 넣는데, 관이 없이 시신을 안치하기도 한다. 덧널 옆과 위는 셀 수 없이 많은 냇돌(하천에 퇴적된 표면이 둥글둥글한 돌)을 채우는데, 일정 간격으로 나무 기둥을 세우고 기둥 사이를 엮은 뒤 돌을 채웠다. 이러한 무덤을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이라 한다. 포항, 울산, 대구, 창녕 등에도 일부 확인되지만 경주가 압도적으로 많아, 신라 최고 지배층 특유의 무덤 구조임을 알 수 있다.

신라 주변 지역인 경산 임당고분군은 무덤 구덩이를 파고 구덩이 바닥에 나무곽을 놓은 뒤 구덩이와 곽 사이를 돌로 채웠다. 구덩이 위는 큰 돌로 덮었다. 의성 금성산고분군은 적석목곽묘와 비슷하지만 무덤 벽을 돌로 차곡차곡 쌓은 듯 정연하여 차이가 있다. 대구 불로동고분군, 성주 성산동고분군은 무덤을 나무곽이 아닌 돌로 쌓은 돌덧널(석곽·石槨)이다. 상주 병성동고분군도 돌덧널이며 길고 좁은 모양이다.

가야의 봉토분은 대체로 돌을 차곡차곡 쌓아 면을 맞춘 돌덧널이지만 초기 봉토분인 지산동 73호분의 경우, 덧널을 놓고 무덤 구덩이와 덧널 사이에 돌을 쌓듯이 채웠다. 인근 합천 옥전고분군도 덧널과 돌덧널을 함께 사용하는 점이 특징이다.

신라·가야 접경의 창녕, 부산 등에도 많은 대형 봉토분이 있다. 창녕은 처음 돌덧널무덤이지만, 천장에는 지산동 73호분, 옥전고분군처럼 나무 뚜껑을 덮었다. 이후 돌 뚜껑으로 바뀌고, 네 벽 중 짧은 한 벽을 틔워 시신과 부장품을 넣는 독특한 방식도 보인다.

시신과 부장품을 넣을 때 공간을 마련하는 모습도 다양하다. 경주시내는 주부곽식(主副槨式), 즉 시신을 묻는 곳(주곽·主槨)과 부장품을 넣는 곳(부곽·副槨)을 별도로 만들다가, 나중에는 한 곳에 합쳐(단곽식·單槨式) 안치한다. 주곽에도 그릇 등이 가득 든 나무 궤를 넣기도 한다. 신라 주변부, 가야와의 접경지 및 고령, 합천 등에서도 ‘日’자형, ‘昌’자형, ‘11’자형, ‘凸’자형, ‘ㄱ’자형 등 다양한 배치를 보이는 주부곽식이 있다.

무덤을 만든 다음 흙이나 돌로 봉분을 채우고 고분의 형태를 완성한다. 신라의 적석목곽묘는 타원형, 그 외는 대체로 원형을 띤다. 봉분 가장자리에 둘레돌(호석·護石)을 놓기도 하고, 구덩이(주구·周溝)를 파기도 한다. 둘레돌은 경주, 대구, 창녕, 고령 등에 있지만 함안, 고성, 부산, 남원, 의성 등 해안지역과 주변부에는 확인되지 않았다. 경주시내 봉토분은 무덤과 적석부를 만든 후 봉분과 둘레돌을 쌓지만, 그 외 지역은 무덤을 만들 때 함께 쌓기도 한다.

포클레인, 덤프트럭이 없는 당시에, 거대한 봉분을 쌓기 위해 여러 방법과 기술이 동원되었다. 작업 공간을 나누거나 위치 표시를 위해 돌이나 진흙덩어리 등으로 열을 지어 기준선을 만든 다음 고운 흙, 진흙, 돌이 섞인 흙 등 다양한 재료로 엇갈리거나 맞닿아 쌓아 무너짐을 방지했다.(구획·區劃성토) 고령 지산동고분군 등에서는 한 봉분 안에 주인공 무덤 이외에 순장자의 무덤을 따로 만드는데, 봉분 축조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정인태
정인태
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또 경산, 고령, 함안 등에서는 도넛 모양으로 봉분 가장자리에 흙둑을 먼저 만든 뒤 안을 채우는 방식(토제·土堤성토)이 나타나기도 한다. 발굴에서 자세하게 관찰하면 방망이로 흙을 다지거나 봉분을 수리한 흔적을 찾기도 한다.

마지막에는 봉분의 모양을 다듬고 표면에 진흙을 한 겹 발라 완성하는데, 최근 창녕 교동과 송현동고분군 발굴에서 뚜렷이 확인되었다. 경주, 대구, 창녕, 고성 등에는 먼저 만든 봉토분 옆에, 합천 삼가고분군은 위에 덧붙여 새 고분을 만든다. 고성에서는 다 만든 봉토분을 일부 파고 여러 무덤을 배치하기도 한다.

이렇듯 옛날 신라와 가야에서는 다양하고 복잡한 방법으로 많게는 수 백기, 수 천기의 고분이 떼를 이루는 고분군을 만들었다. 지금 우리는, 신라·가야인이 남겨 놓은 봉토분을 통해 그들의 정신세계와 기술력을 느낄 수 있다. 금은보화와는 또 다른 과거와의 연결고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