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총의 부장품 수장궤를 조사하는 모습.

사람들은 ‘경주’라고 하면 거대한 무덤을 떠올릴 것이다. 그 가운데 규모가 큰 것은 대릉원 일원(사적 제512호)에 모여 있다. 요즘은 그 서편으로 ‘황리단길’이 조성되어 경주를 방문하는 이들이 많이 찾곤 한다. 1970년대 대릉원이 막 조성될 무렵을 보자면 경주의 풍경도 많이 변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곳을 여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거대한 무덤에 압도되고 말 것이다. 무덤이 만들어질 그 옛날에도 왕과 귀족의 사후(死後) 평안을 바라는 최고·최대의 구조물이었던 만큼 그 안의 부장품은 최고 수준이었다. 이러한 거대 무덤들은 대부분 도굴이 어려운 돌무지덧널무덤인 까닭에 많은 유물을 원형에 가깝게 보존하고 있다. 이는 문헌 자료가 부족한 당시의 역사를 복원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4~6세기 신라 마립간기(麻立干期)를 대변하는 이러한 구조물의 축조는 당대에도 국가 차원의 사업이자 사람들에게는 큰 화제였을 테지만, 오늘날에도 이러한 무덤 발굴은 많은 관심을 받는 큰 사업임은 틀림없다. 그 가운데서도 천마총과 황남대총의 발굴은 당시 전 국민의 관심을 모았고 한국 고고학계에서도 기념비적인 사업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처럼 문화재 발굴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두 고분의 발굴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을까?

황남대총과 천마총을 발굴하였던 70년대는 우리나라가 산업화를 시작하고 급변하던 시기였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를 개통하고 관광자원을 확보할 목적으로 1971년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을 수립하였다. 그 일환으로 미추왕릉지구 정화사업 이루어지면서 황남대총과 천마총 발굴을 기획하였던 것이다.

원래는 황남대총을 발굴하여 그 내부를 복원·공개할 계획이었으나, 남·북분을 합치면 120m에 달하고 당시 조사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에 앞서 천마총을 시험 발굴하기로 한 것이다.

천마총 발굴은 1973년 4월에 착수하여 그해 12월까지 단 8개월 만에 마무리하였다. 이처럼 조사가 단기간에 그치고 황남대총을 위한 시험적 발굴이었지만, 그 성과는 적지 않았다. 무덤의 주인공이 쓴 금관과 천마(天馬)가 그려진 장니(障泥)를 비롯하여 1만1천526점의 유물을 수습한 것이다.

이와 함께 목관(木棺) 주위에 두른 석단(石壇·돌로 만든 단) 구조를 처음으로 확인하는 등 지상식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를 명확히 밝히는 성과가 있었다. 이는 일제강점기의 유물 수집 목적의 발굴에서 벗어나 사분법(四分法)을 고분 발굴에서 처음으로 도입하는 등 조사방법의 큰 진전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천마총 발굴이 일단락되고 관광자원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한 듯 보였기에 황남대총의 발굴을 중단할 수도 있는 여지가 생긴 듯하였다. 당시 발굴을 담당하였던 김정기 단장도 황남대총 발굴에 대해 시기상조로 보아 내심 그런 기대를 한 것 같다. 하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천마총의 성과는 오히려 그다음 발굴인 황남대총에 대한 기대를 한껏 높여놓았고 발굴은 강행되었다.

정익재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
정익재
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

황남대총 발굴은 북분을 먼저 조사하고 남분을 조사하였다. 이는 발굴 과정상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두 고분을 동시에 발굴하였을 때 오는 착오를 미리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북분은 1973년 6월 천마총의 적석부(積石部·시신을 안치하는 나무곽을 둘러싼 돌무지)를 조사할 무렵 봉분 발굴을 시작하였고 다음 해 12월까지 1년 6개월 동안 이루어졌다. 북분 발굴에서는 역시 피장자가 착장한 금관을 비롯하여 3만5천769점의 유물이 출토하였다.

또한, 나무곽 주변으로 적석(積石)을 쌓기 위해 마련한 목가구(木架構) 구조를 처음으로 확인하여 천마총 발굴에 이어 또 하나의 신라고분 구조를 밝히는 성과가 있었다. 남분 발굴은 북분의 적석부가 조사될 무렵인 1974년 8월 재착수하여 1975년 12월에 마무리하였다. 남분 발굴에서는 천마총, 북분과는 달리 금동관이 출토하였고 이를 비롯해 모두 2만2천793점의 유물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남분 조사에서는 시신을 안치하는 나무곽이 2중 곽(또는 3중 곽)인 구조를 처음으로 확인하여, 남분보다 뒤에 만든 북분, 천마총과는 또 다른 형식의 무덤 구조를 밝힐 수 있었다.

이처럼 천마총과 황남대총의 발굴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 학계에는 신라 고분연구의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줬을 뿐만 아니라 돌무지덧널무덤의 조사방법, 구조, 편년, 유물 등 적지 않은 성과가 도출되어 이후 발굴 조사와 연구의 근간을 형성하였다. 더불어 일반 시민에게는 대표적 여행지로 자리했고, 대외적으로는 발굴된 유물이 다른 나라의 박물관 등에 전시돼 우리나라의 국격을 높이고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경주를 오게 된다면 마립간기의 신라와 1970년대 대한민국의 이야기를 간직한 황남대총과 천마총을 꼭 한 번 답사하길 바란다. 아울러 이러한 문화유적이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이고 나아가 다음 세대에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지 한번 고민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