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12월 19일 국무회의에서 “국익과 국민을 우리외교의 최고 가치로 삼아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용외교를 펼쳐나가고자 한다.”고 천명했다. 정치적 이념보다 실용적 가치를 중시하여 외교적 활로를 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용외교의 성공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실용외교에는 필수적 전제조건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첫째, 설정된 외교정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의 선택에 있어서 정치적·이념적 제약이 없어야 한다. ‘외교는 내정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에 대통령은 국내적 이념경쟁과 정치논리로 외교를 이용하려는 유혹을 받게 된다. 이는 외교가 대통령의 정치이념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용외교를 위해서는 변화무쌍한 외교환경에 대한 객관적 인식과 균형 감각이 매우 중요하다. 경직된 정치이념과 제한된 선택수단의 강요는 이념외교일 뿐이다.

둘째, 실용외교를 위해서는 ‘이상보다 현실에 대한 민감성’이 있어야 한다. 북한의 핵보유, 남북대치, 미중갈등 등은 우리외교가 직시해야 할 분명한 현실이다. 현실의 국제정치는 힘의 정치이다. 힘의 논리를 정확히 이해하는 외교가 실용외교이다.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은 노련한 실용주의 외교전문가이다. 비핵국가인 한국이 북핵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실용외교는 한미동맹에 의한 확산억지력의 보장이다. 반면에 북한의 협상의도를 간과하고 대화를 통해서 비핵화를 유도하겠다는 것은 ‘장밋빛 환상’에 빠진 이념외교에 지나지 않는다.

셋째, 실용외교는 반드시 외교전문가의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외교는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영역이다. 외교관은 현안 장악력이 강력해야 효율적으로 협상을 진행할 수 있다. 전문성이 없는 정치권력이 ‘외교의 전문성’을 지배하면 실용외교는 사망한다. 외교부장관이나 대사들에게 중요한 것은 권력의 입맛에 맞는 정치이념이 아니라 실용외교에 걸맞은 능력이다. 그럼에도 진보라는 정치이념으로 무장한 청와대가 외교의 전문성을 부정하고 권력에 충성하는 ‘코드인사’를 통해 이념외교를 고집하였으니 외교참사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었다.

마지막으로 최고정책결정자인 대통령의 열린 사고와 합리성이다. 실용외교는 열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합리적 토론의 결과물이다. 때문에 닫힌 사고와 이념적 경직성은 실용외교의 적이다.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영역에서 동일한 사고를 가진 청와대의 집단사고나 대통령의 일방적 지시로 실용외교가 성공할 수는 없다. 국민과 권력, 국익과 이념이 충돌할 때 전자를 위해 후자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으려면 대통령의 열린 사고와 합리적 판단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문 대통령이 대외적으로는 실용외교를 천명했지만 실제로는 그에 역행하는 인식과 행태를 보였으니 치열한 외교전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지금이라도 초심으로 돌아가서 이념외교의 환상을 버리고 실용외교의 길을 모색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