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손경찬의 대구·경북人
서양화가 문상직 화백

화가는 영혼이 맑은 사람이다. 문상직 화백 역시 그렇다.

작품을 구상할 때 작가는 간혹 심상에 떠오른 이미지를 따라가기도 한다. 그럴 때 작가는 눈으로 확인되는 실체보다 심상에 떠오른 이미지를 더 믿게 된다. 그것은 이미지가 품고 있는 여백이, 실체가 갖지 못한 환상으로 상상의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본을 따라 그리듯 모든 물상을 꼭 사실적으로 그려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너무 단조롭다. 밤에 쓴 문장을 다음날 아침에 지우는 일이 있더라도 작가는 환상을 따라가는 모험을 망설이지 않는다. 물상이 재창조 되는 은유의 과정은 창작에 종사하는 모든 예술가들이 아프게 겪어야 하는 일이다. 문상직 화백의 양 그림이 그런 변이의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는 것은 기억해둘만한 일이다.
 

“양이 무리지어 있는 모습에서 인간의 삶을 보고,
가족의 개념을 보는 것은 그림을 보는 이의 마음이다.
자기 느낌에 충실한 것이 곧 그림을 보는 궁극적인 목적이고 순수함이고 자연스러움이다”

화백의 양 그림을 보며 문득 시대정신을 떠올렸다. 위로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에 마치 부름을 받고 온 듯 구름을 닮은 양 무리가 풍요롭고 온유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코로나 19가 시작된 것이 일 년 전 이맘때쯤이었다. 그날 이후로 세상의 모든 가치관과 문화가 바뀌고, 사람들은 격리에 익숙해져야 했다. 갑작스러운 홀로서기에 혼돈이 일었다. 밖에서 안으로, 물상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다수에서 개인으로 분화를 거듭하며, 시대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정체성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인간을 고독한 지경으로 몰아넣는 범상치 않은 시대에, 양 그림을 보고 위로를 받았다면 감정과잉이라고 해야 할까? 화백이 어떤 마음으로 그렸건, 양 그림은 그 특유의 치유와 위로의 능력으로 그림을 보는 사람의 감정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며 아름다운 감화를 준다.

“양을 그리게 된 계기가 뭐예요?”

화백이 비 오는 날의 안개를 말했다. 해평 도리사에 갔다가 비를 만났다고 한다. 우산을 갖고 가지 않아서 비를 조금 맞았고, 나무 밑에서 비를 피했다. 역사의 더께가 덮인 부도(浮屠)를 보고 능선을 걷는데, 멀리 낙동강 줄기와 능선으로 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바람 따라 흐르는 안개의 무리가 양떼의 모습으로 보였어요. 그날 집에 와서 세 살배기 딸을 위해서 50호짜리 양 그림을 그렸어요.”

그게 시작이었다. 화백은 세 살 된 딸을 위해서 첫 번째 양 그림을 그렸고, 그 작업이 매우 재미있었다. 그 의미 있는 그림을 아무에게도 주지 않고 딸이 사십 살이 된 지금까지 고이 간직하고 있다. 마음에 품은 어떤 것을 갖고 있다는 것은 참 고귀한 일이다.

양 그림을 그리기 전에 화백은 꽃과 해바라기, 수녀, 소녀와 같은 맑은 소재의 그림을 그렸다. 전시회 팸플릿을 보고 있으려니 그림이 곧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물은 보는 사람의 마음만큼 보이는 것인데, 그 맑음이 부럽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하다. 화백은 대구여고 근무할 때 소녀시리즈를 많이 그렸다고 한다. 너무도 맑아 보이는 아이들의 영혼을 그대로 그림에 담았다. 소녀시리즈가 ‘야망의 세월’ 외의 드라마 세 편에 세팅되기도 했다. 문제는 소재의 한계였다. 소녀시리즈와 수녀시리즈로 전시회 초대를 받으면 소재의 한계 때문에 공포가 찾아오더라고 했다. 소녀를 그만 그리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만난 것이 도리사의 안개였고, 양떼의 모습이었다. 신의 한수였다. 꽃과 수녀, 소녀의 소재가 양으로 변화를 거듭하며 소재에 대한 공포가 없어졌다. 화백의 인생에 굵은 획을 긋게 해준 양 그림이 그렇게 탄생했다.

“그림에 모가 없네요. 그림이 구름처럼 부드럽고 몽상적이기까지 한 이유가 뭘까요?”

“작업하며 느낀 건데 그림에 선이 있으면 너무 강해서 부드러움이 없어집니다. 선은 서로 끌어당기려는 힘을 갖고 있거든요. 선을 빼버리니까 소재가 부드러워졌어요. 우리 얼굴이 그런 것처럼.”

선과 각을 없애고 구성과 색채까지 단순화하며 양 그림은 보는 이를 고요하고 평화로운 정적 세계로 이끈다. 저녁 해를 받으며 무리 지어 노니는 양떼의 평화로움을 보며 위로를 받는 건 고요함으로 인한 치유의 느낌 때문이다.

“소재를 단순화된 구성에서 세상의 모든 위악적인 요소가 제거되어 있는데 위안을 의도하신 건가요?”

“그림은 보고 느끼는 사람의 마음에 따르는 것입니다.”

신부님도, 스님도, 산부인과 의사도 양 그림을 보고 편안함을 느꼈다 하더란다. 그림만 보고 감상하는 것과 작가를 알고 감상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화백은 작가를 알고 그림을 보면 왠지 한 꺼풀이 덮이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양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양이 무리지어 있는 모습에서 인간의 삶을 보고, 가족의 개념을 보는 것은 그림을 보는 이의 마음이다. 자기 느낌에 충실한 것이 곧 그림을 보는 궁극적인 목적이고 순수함이고 자연스러움이다.

“전체적인 구성과 색채를 최소의 단위로 단순화 시킨 이유가 있으신지.”

“나는 양을 본 적이 없어요. 실제의 양은 환상처럼 아름답지 않아요.”

실체를 보고 그렸으면 뿔도 그리고 암수 구별도 했을 텐데, 보지 않고 심상을 따라가다 보니 선이 없어지고 소재에 맞게 색채가 단순화되더라고 한다. 색채가 많으면 혼란하다. 그림도 버릴 수 있고, 눈에 보이는 것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를 버리고 꼭 필요한 것만 남기느냐 하는 것은 작업할 때 느끼는 감정대로 결정한다.

“자연친화적인 소재를 위해 여행을 많이 다니시는지.”

“아침저녁으로 드라이브를 잘 나가요. 해가 뜨고 질 때 느끼는 기분과 보이는 풍경에서 내 나름대로 양을 그려요.”

아침 해와 저녁 해가 다르다. 황혼이 쏟아질 때면 색채의 단순화가 이루어지고 색깔이 확연히 정리된다. 색채가 많으면 그림이 혼란하다. 전체적인 기분을 느끼고 오면 그대로 그린다.

“양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그림에 사인이 들어가면 그 그림은 작가와 멀어져요.”

그림은 보는 사람이 느끼는 것인데 사인이 들어가면 어쩔 수 없이 작가는 그림을 벗어나지 못하고 거기 머물게 된다며, 화백은 자기인식에서 머물지 않기 위해 그림을 완성하면 모두 포장을 해둔다고 한다. 그림을 작업실에 펼쳐두면 자신도 모르게 끌려가게 된다고. 자기 복제와 스스로 만든 사인에 갇히는 것을 경계하는 것 같다. 화백은 언제부턴가 그림을 두껍게 그리더라고 했다. 소녀시리즈 수녀시리즈가 두껍게 그린 그림이라고. 양 그림을 그리며 그 두꺼움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비슷한 풍광을 보고도 심상을 흔드는 어떤 영감을 받으시나요?”

“산과 들이 모두 비슷하지만 늘 같은 것을 보면서도 달리 느껴지고 뭉클하게 감화를 받을 때가 있어요. 해질녘에 특히 그런 감화를 많이 받아요.”

한낮에는 못 느끼지만 해가 뜰 때와 해가 질 때의 감정이 다르다고 한다. 황혼 같은 커다란 분위기에 젖어 있으면 그 색채 속에 모든 것이 묻혀간다고 한다.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황혼이 쏟아지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그때그때 심상에 와닿는 느낌을 화폭에 담는다고.

“색채를 서너 가지 색상으로 단순화 하신 배경을 들려주세요.”

“거제 해금강에서 갈매기 섬으로 알려진 홍도에 갔던 적이 있어요.”

그날 화백은 무인도로 가는 배를 탔는데, 뱃전에 수녀 두 분이 손을 꼭 잡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정겨워 보인다고 느낀 순간 검은 수녀복과 두건의 흰 띠, 바다의 푸르름이 너무도 깨끗하면서도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왔고, 그 단순한 색채를 의식한 순간 ‘바로 저거다!’ 하는 생각이 들더란다. 그리 많은 색이 없어도 되겠다는 느낌으로 색채가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거기서 화백은 색깔을 없애는 것으로 욕심을 버렸다.

“그림을 시작하는 이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면요?”

“그림쟁이는 영혼이 맑아야 해요.”

그림은 창조 작업이다. 사실대로 그리는 것은 연습 과정에 거쳐 가는 과정에 불과하다. 베끼는 것도 따라 그리는 것도 하나의 과정일 뿐 거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작가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확보하려면 먼저 자연주의라는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일러주신다. 양 그림을 통해서 화백은 단순화된 인간의 삶을 보여준다. 무리 지은 양떼 속에 가족이 있고 이웃들의 군상이 있다. 양의 숫자는 구도에 따라 많아지기도 하고 적어지기도 한다. 양의 본질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다. 거기에는 어떤 대결도 반목도 없다. 꽃과 소녀, 수녀를 거쳐 양 그림에 이른 변화를 통해 화백은 자기만의 독창적인 세계에 이르렀다. 화백이 말씀하신다. 중요한 것은 느낌대로 그리는 것이라고. /글 장정옥 소설가

(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