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의 진면목을 알고 싶다면 “당신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를 물어야 하지 않을까. /pixabay.com

사람이 처음 만나면 통성명을 하고, 바로 다음에 따라 오는 질문은 아마도 이런 게 아닐까. “실례지만, 하시는 일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나이, 사는 곳, 관심사 같은 것에 대한 질문은 보통 그 다음에 이루어진다. 최근 한 술자리에서 어떤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도 직업을 물었다. “저는 가수 겸 시인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하면 많은 사람들은 나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직장인이거나 자영업을 하는 분들에게 내 직업은 생소하게 여겨지곤 한다. 금융권에 종사한다는 그 역시 내 직업을 듣고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조심스레 질문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내용이 독특했다.

“시를 쓴다고 다 시인은 아니잖습니까. 시인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내가 언제부터 스스로를 시인이라고 소개하기 시작했는지를 떠올려보면 별로 어려운 대답이 아니었다. 나는 2008년에 계간 ‘시와 세계’에 시를 발표한 이후로 시인이라 소개하기 시작했고, 남들에게도 그렇게 불리게 되었으니까.

“아, 그렇군요. 그러면 혹시 가수가 되는 것에도 그런 기준이나 절차가 있나요?”

가수의 기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시인이 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처럼 간단치가 않았다. 시인처럼 등단이라는 절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변호사나 의사처럼 라이선스 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이 사람이 가수임을 인증할 수 있는 국가공인 기관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대충 얼버무리긴 했지만 그 질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도대체 가수라는 직업은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 것일까. 가수란 무엇일까.

노래를 불러 소득을 올리고 생활을 꾸려나가는 사람이 가수일까? 아니, 내 주변에는 훌륭한 음악을 만들어내며 업계 내에서도 인정받고 있지만, 그것이 소득으로는 연결되지 못해 다른 일을 통해 생계를 유지해나가는 동료들이 얼마든지 있다. 앨범을 내면 가수가 될까? 그 또한 틀린 말이다. 주변의 몇몇 사람들은 단지 취미나 호기심으로 앨범을 만들어 발표하기도 했는데, 그들을 가수라고 부르는 것은 민망한 일일 것이다. 나는 어떻게 스스로를 가수라고 소개할 수 있게 된 것일까. 첫 앨범이 나오기 전부터 나는 홍대 앞의 작은 무대에 서서 “안녕하세요, 가수 강백수입니다” 하고 소개했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당위성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저 나 스스로 ‘그래, 나는 가수야’라고 생각한 것만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결국 가수라는 말은 사회적 위치인 직업과는 별개로 스스로 규정하는 정체성인 것이다. 앨범을 내지 않은 채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더라도 스스로 가수라는 정체성이 있다면 가수일 수 있고, 취미로 낸 앨범이 어쩌다 화제가 되어 수익을 창출했더라도 정체성이 없다면 가수가 아닐 수 있는 것이다. 정체성이라는 것이 소속이나 사회적인 위치보다 삶에 있어 훨씬 강력한 기준이 될 수도 있다.

강백수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강백수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직업이나 소속이 정체성과 일치하는 사람들도 많고, 그래야 한다는 전통적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사회적인 위치와는 별개의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든지 있다.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 박 대리는 하루의 대부분을 전자회사 사옥에서 보내지만 여건만 갖추어진다면 언제든 프렌차이즈 커피전문점을 차릴 준비가 되어 있다. 반도체건 아메리카노건 귀여운 아들, 딸이 좋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도록 뒷받침 해줄 수 있다면 아무 상관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는 박 대리라는 사회적인 위치보다 아빠라는 정체성을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가족에 대한 그의 애착을 알지 못한 채 그의 회사와 직함만을 기억하는 건 그에 대해 절반도 알지 못하는 것이 된다.

독립음반 기획사 대표 송 형은 언제나 자신을 음반제작자라 여기며 살아간다. 비록 그가 꾸려가는 음반제작사의 매출이 가계를 책임지고 있지 못하고, 다른 일을 통해 생계를 꾸려가고 있지만 그는 음반제작사를 통해 자아실현을 해나가고 있다. 그에 대해 알기 위해 더 중요한 것도 그가 무엇을 통해 먹고 살고 있느냐 하는 것보다 어떤 정체성으로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을 알고, 이야기를 들어도 그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내가 그가 하고 있는 일이나 사회적 위치만큼 그의 정체성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에 대해 진정으로 알고 싶다면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가 아니라 “당신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를 물어야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