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기자가 만난 경북 사람
고창대유외과의원 고창대 원장

의료봉사에 열심인 의사로, 때론 아마추어 성악가로 살아온 고창대 원장.

기자의 개인적 경험에 한정시켜 말하자면 유능한 의사보다 더 만나기 힘든 게 ‘따스한 의사’다. 환자의 아픈 육체만이 아닌 두려운 마음까지 다독여 위로를 통한 치유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의사 말이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포항 고창대유외과의원 고창대(52) 원장은 따스한 의사임이 분명해 보인다.

2000년대 초반. 막 개원한 젊은 외과의였던 고창대는 유방암 진단을 받은 환자를 만난다. 서울의 큰 병원에서 수술하자는 가족들의 권유에도 그녀는 고 원장에게 수술 받기를 원했다. 이유는 하나.

이전에 앓았던 병을 말한 후 “얼마나 힘드셨어요?”라는 위로의 말을 고 원장으로부터 들었기 때문이었다. 의사에게는 때로 의술보다 심성이 더 중요한 순간이 있다. 고 원장은 그때 이 사실을 깨달았다.

젊은 시절엔 군 복무를 대신해 의료 환경이 열악한 방글라데시에서 30개월 동안 의료봉사 활동을 펼쳤고, 첫아들도 그 나라에서 낳았다. 그때의 보람과 뿌듯함을 잊지 못해 이후에도 여름휴가를 포기하고 베트남, 캄보디아, 몽골, 멀리는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까지 의료봉사 활동을 다녔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장래희망이던 의사의 길

2002년 경북 최초 유방전문병원 개원하며 이뤄

유방암 환자 종합병원에 입원시켜 직접 집도 등

전국 개원 외과의로서 첫 개방형병원 제도 시행

군 복무 대신 방글라데시 30개월 의료봉사 계기

여름휴가마다 아시아·아프리카 등서 봉사 펼쳐

아마추어 성악가로 노래 재능기부도 함께 해 와

그는 말한다. “관광객으로 갔다면 결코 보지 못했을 그 나라의 속살을 살필 수 있었고, 고통에 처한 현지인들을 진료하면서 외과의사로서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걸 이해해준 아내와 자식들에게 고맙다”고.

몇 년 전부턴 또 하나 ‘나눔의 방식’도 찾아냈다. 바로 노래다. 고 원장은 아마추어 성악가이기도 하다. 의료봉사가 자신이 가진 재능을 세상과 나누는 첫 번째 수단이었다면, 노래는 누군가에게 감정적 행복감을 선물하는 그의 또 다른 재능기부 방식이다.

이처럼 선량한 마음으로 나눔을 실천하며 살고 있는 고창대 원장과의 만남은 시종 즐겁고 유쾌했다. 아래는 바람 차갑던 지난 수요일 오후, 그가 일하는 병원에서 만나 나눈 이야기의 핵심을 정리한 것이다.

-포항에서의 개원은 언제였나.

△2002년이다. 유방, 갑상선 관련 암과 질병에 대한 수술과 진료를 주로 한다. 개원 당시엔 유방전문의원이 전국에 열 군데 정도였고 경북에선 내가 최초다. 생소한 과목이고 병원 운영의 미래도 불투명했다. 그러나 외과의사를 선택한 내 결정을 후회한 적은 없다. 개원 초기엔 ‘개방형병원’이란 제도를 이용해 환자를 종합병원에 입원시킨 후 직접 가서 유방암 수술을 집도했다. 전국에서 개원한 외과의가 이렇게 한 건 처음이었고, 이 사례를 유방암학회에서 발표도 했다.

 

-의사의 꿈은 언제부터 가진 것인지.

△초등학생 시절부터 장래희망이 의사였다. 다행히 성적이 나쁘지 않았기에 다른 생각 하지 않고 의대를 지원했다. 운 좋게 합격할 수 있었다. 포항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엔 사소한 일탈도 했다.(웃음) 당시엔 상위권 학생 중 신청자들이 학교에서 함께 자며 공부했다. 정식 기숙사가 아닌 임시 숙소였는데 거기서 3학년 학생들이 당직 교사의 눈을 피해 화투를 치며 놀았던 기억이 있다.

-의대 재학 시절 에피소드는.

△공부와 시험에 파묻혀 살았다. 시체 해부 실습도 여러 친구들이 함께 해주었기에 큰 두려움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에델바이스’란 이름의 중창단에서 활동한 건 즐거운 추억이다. 의대엔 클래식 악기를 연주하는 동아리는 있었는데, 노래 동아리가 없어 우리 동기들이 처음으로 만들었다. 첫 연주회 지휘를 내가 맡았던 것도 잊을 수 없는 학창시절의 기억이다. 현재 ‘에델바이스’는 의대 내에서 최고의 인기 동아리가 됐고, 해마다 발표회도 연다. 수련의 시절엔 너무나 엄했지만, 전문의가 된 이후엔 누구보다 우리들에게 자상했던 소아외과 교수님도 잊을 수 없다.

-방글라데시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한 것으로 안다.

△학생 때부터 인생의 일부분은 봉사활동에 투자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OECD국가에서 의무적으로 후진국에 ‘국제 협력 의사’를 파견하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지원했다. 매년 파견되는 나라와 전문 과목이 다른데 당시 방글라데시에서 외과의를 필요로 해 거기로 가게 됐다. ‘국제 협력 의사 4기’다. 꼭 가고 싶어 미리 방글라데시에 있는 선배들에게 연락도 하고, 영어 면접 준비도 열심히 했다. 당시 연애 중이던 지금의 아내도 내 뜻에 동의했고 신혼을 방글라데시에서 보냈다. 첫아들도 거기서 낳았다.

 

생활 방식과 사회 구조의 변화로 유방암 환자는 계속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예약 대기 시간을 줄이면서도 환자 한 분, 한 분에게 충분한 설명을 드리려는 노력을 지속할 것이다. 상황이 좋아지면 의료봉사는 물론, 노래를 통한 재능기부도 다시 시작하고 싶다.

-방글라데시에서 당신이 본 것과 느낀 것은.

△방글라데시는 가난한 나라다. 하지만, 국민들은 궁핍함을 비관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그들 대부분이 무슬림인데 시간에 맞춰 기도를 빼놓지 않으면 다음 생에는 보다 나은 환경에서 태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힘들 때도 있었다. 임신한 아내가 입덧으로 너무 고통스러워하기에 홀로 한국으로 보낸 적도 있고, 두 살배기 아들이 풍토병에 걸려 고생하는 모습을 지켜봐야했던 게 마음 아팠다. 한국이라면 걸리지 않았을 병 아닌가.

하지만 보람이 더 컸다. 타인을 도와줄 수 있는 내 환경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고, 힘겹게 살아가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현지인들과의 만남은 내게 많은 걸 가르쳤다. 한국에서라면 보지 못했을 넓은 세계의 변화를 감지하는 안목도 키울 수 있었다. 더불어 외과의사로서의 자부심을 새삼 다진 시간이었다. 의료봉사 현장에서 가장 적합한 과목이 외과임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방글라데시 외에도 다양한 지역으로 의료봉사를 다닌 것으로 들었다.

△귀국 후 처음엔 서울에 살았는데 외국인노동자 진료에 참여했다. 한국에 온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이 자기 나라 말을 쓰는 한국인 의사를 신기하게 보며 반갑게 다가오기도 했다. 방학 기간엔 팀을 만들어 몽골, 캄보디아, 베트남 등을 다녀왔고 몇 년 전엔 포항시장 등과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를 다녀왔다. 의료서비스를 받아 보기 힘든 현지인들을 진료하면서 의사만이 느낄 수 있는 감동을 맛보았으니, 의료봉사 활동을 통해 내가 그들에게 더 큰 선물을 받은 셈이다.

-의사로 살아오며 잊을 수 없는 환자는.

△개원 초기다. 그때는 포항에서 유방암은 완전절제수술만 했는데, 지역 최초로 유방보존수술을 시작했다. 40대 여성 암환자가 있었다. 서울의 대학병원에서 수술받자는 친지들의 권유에도 내게 수술을 신청했다. 이유를 물었다. 자신이 과거에 앓았던 자궁암에 관해 누구도 “힘들었지요?”라고 묻지 않았는데, 내가 그 이야기를 해줬기 때문이라고 했다. 의사에겐 실력만이 아닌 환자의 마음을 알아주고 다독여주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는 걸 그때 알게 됐다.

 

-‘의사 고창대’로서의 보람과 고민은.

△외과의사가 된 걸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유방 질환 전문가로서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생활 방식과 사회 구조의 변화로 유방암 환자는 계속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그 부분을 살펴줄 전문가가 필요하다. 다행히 다녀간 환자들이 인정해 주고 알려준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싶어 한다. 예약 대기 시간을 줄이면서도 환자 한 분, 한 분에게 충분한 설명을 드리려는 노력을 지속할 것이다.

-아마추어 성악가로도 활동하고 있는데.

△2018년 의대 졸업 25주년 행사에서 중창단으로 무대에 섰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교회 성가대 활동을 하고 있다. 2018년 이후엔 레슨도 받기 시작했다. 이후 포항에서 작은 연주회도 열고, 2019년엔 아마추어 성악 콩쿠르에서 입상도 했다. 또, 포은도서관이 주관한 재능기부 프로그램에도 참여했다. 아름다운 노래로 환자들과 더욱 친근하게 소통하고 싶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지난해엔 코로나19로 봉사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다. 상황이 좋아지면 의료봉사는 물론, 노래를 통한 재능기부도 다시 시작하고 싶다. 바쁘게 살다 보니 벌써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흔히들 ‘100세 시대’라고 말한다. ‘내가 이 나이에 뭘 할 수 있을까’라고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삶을 계속 추구하고자 한다. 내 도전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나 역시 행복하지 않겠는가.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