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실향민(失鄕民)은 분단된 북쪽 고향을 잃은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남쪽에도 고향을 잃은 사람이 많다. 코로나의 광풍이 고향길까지 막는 서글픈 시절이다. 고향도 일가 친지도 가족도 찾지 못하는 설 명절이 되어 버렸다.

‘거리는 멀어도 마음만은’이라 하지만 거리가 멀면 마음도 자연히 멀어지기 마련이다. 아이들의 동요 ‘까치의 설날은 어제께 지만 우리들의 설날’은 오늘이 아닌 기약 없는 내일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비대면의 암울한 상태가 길어질수록 그 옛날 고향, 설, 친구들이 그립다.

달포 전 고향 마을을 다녀왔다. 어느 시에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더니 산천도 어릴 때의 그 산천이 아니었다. 물이 콸콸 넘치던 개천도 사라져 버리고, 가파르던 산에도 도로가 나 있었다. 소먹이 가서 동무들과 놀았던 큰 바위는 무척 작아져 버렸다. 어릴 때 첫 새벽부터 동네 사람들의 육성으로 외치던 동장어른, 스피커도 확성기도 없던 시절 그 어른의 걸직한 목소리만 귀에 맴돌고 있다. 한학 공부를 많이 하여 우리가 무척 따랐던 그 어른도 세상 뜬 지 오래되었다. 당시 대학 진학한 자랑을 입버릇처럼 하던 할머니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어릴 때 집성촌의 어른, 친지, 친구들마저 사라진 고향은 내 고향은 아니었다.

설 명절이 오면 고향의 세시풍습이 무척 그립다. 섣달그믐 저녁부터 준비한 합동 세배도 없어진 지 오래다. 어릴 때 나는 그믐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쉰다는 풍설을 믿었다. 밤 새워 동서로 나누어 윷놀이를 했다. 모두가 목이 터져라 응원하고 합창도 하였다. 당시 동지섣달 긴긴 겨울 밤 우리는 매일 친구 집 사랑방에 모였다. 관솔불을 밝히면서 메주 냄새 쾌쾌한 친구집을 찾았다. 쌀밥에 김치 한쪽뿐인 밤참이 그렇게도 맛있었다. 호롱불 기름 닳는다는 친구 어머니의 성화에도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시 올 수 없는 그리운 풍경이다.

드디어 눈이 소복이 내린 명절 아침이다. 달포동안 장만한 음식들이 차례상에 올랐다. 우리 마을 제사는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함께 지내니 제관은 20여 명이 훨씬 넘었다. 명절 제사는 단잔을 올렸지만 음복과 떡국을 나누다 보면 정오쯤 제사가 모두 끝난다. 함께 했던 고향 설날 제사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설날 아침부터 오랜만의 기름진 고기와 막걸리에 취해 다투던 어른들의 모습도 자주 보았다. 설날 오후부터는 동네 어른들을 찾아 빠짐없이 세배했던 일이 어제일 같이 떠오른다. 아름답던 그 정월의 고향 풍습은 어디로 갔을까.

이제 고향마을 어딜 가나 전기불이 들어와 있다. 어느 집 마구간에도 경운기가 버티고 있고 마당에는 자동차가 서 있다. 우물가의 두레박도, 냇가에서 빨래하는 모습도 더욱 찾아 볼 수 없다. 가재 잡던 도랑도 없어지고 물맛 좋던 옹달샘마저 없어져 버렸다. 허리 굽은 소나무와 대나무 숲만이 우리를 반기고 있다. 동네 어귀 그네를 매던 키 큰 참나무도 사라진 지 오래다. 아이들의 팽이 놀이, 썰매 타기는 동네 어디에서도 찾을 길 없다. 사람도 풍습도 사라져 버린 고향은 어릴 때 내 고향이 아니다. 고향 잃은 자들의 슬픔은 나만의 슬픔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