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읽으면 좋은 책

어릴 적, 설이 다가오는 시기에는 집집마다 설 준비로 바빴다. 엿을 고고, 가래떡을 뽑고, 집안 대청소도 했다. 고향 떠나있던 자식들이 돌아오고, 친척들이 인사를 올 것이기에 미리 준비를 하는 것이다. 올 설은 거리두기 하는 시기이다. 소설과 수필로 연휴를 채우고 백석의 시로 그날의 분위기를 대신 느껴보길 바란다.

△‘여우난골족’/ 백석 시·홍성찬 풀어쓰고 그림

이 그림책은 1935년 잡지 ‘조광’에 처음 발표된 백석의 대표시를 그린 것이다. 명절날 엄마, 아빠를 따라 큰집에 가 친척들을 만나 음식을 나눠먹고 즐겁게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는 풍경이 그려진다.

어린 ‘나’의 시점으로 구수하게 풀어낸 이야기가 대하드라마처럼 느껴지는 것은 시인이 선택한 평안북도 정주 사투리 덕분이다.

백석의 고향 정서와 풍습이 잘 드러나도록 홍성찬 작가는 연변산골마을에서 설을 쇠며 그림책의 뼈대를 잡았다. 그래도 부족한 부분은 평안도 실향민들의 도움을 받았다. 판소리 사설처럼 구성지게 넘어가는 장단으로 평범한 우리 어른들의 삶과 고향의 밤을 잘 보여준다.

사실 백석의 시에 나오는 평안도사투리를 읽을 때는 다 이해하지 못한 느낌들이 그림책으로 펴내며 풀어놓아서 또 그림과 함께 읽으니 다 이해가 됐다. 그래도 어린이들이 다 이해하지 못 한 낱말은 뒷장에 사투리 사전처럼 적어두어 친절하게 찾아보도록 했다. 송기떡과 무이징게국, 텅납새는 처음 듣는 말이라 설명을 읽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코로나로 북적거리지 못 할 이번 설 분위기를 그림책을 통해 느껴본다.

△ ‘행복한 고구마’/ 목성균 수필선

목성균 작가는 글이 한창 피어날 즈음 돌아가셨다. 본인도 놀라셨겠지만 그분의 1집을 받아들고 좋아했던, 곧 뵈러 가자고 했던 우리들의 말들이 허공에 뿌려지게 되어 참 많이 놀랐었다.

‘행복한 고구마’는 작가의 1집, 2집, 유고집에서 골라 따로 엮은 수필이다. 어떤 이는 목성균의 수필을 소설이라고도 한다. 그림이 훤히 그려지고 이야기의 힘이 있어서 그럴 것이다. 세한도가 딱 그런 글이다. 사기등잔은 수필의 정석이라 처음 글을 배우는 이들에게 교과서처럼 읽히고, 어떤 직무위기는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수필가들 속에서만 불려지던 목성균이란 이름이 전국에 알려지게 된 것은 KBS ‘아침마당’ 덕분이다. 어느 날 아침에 그 프로그램에 나와서 강의를 하던 분이 자신이 좋아하는 글이 있다고 잠시 언급한 것이 누비처네였다. 작가의 젊은 시절, 아버지가 부친 아기 포대기 값에 얽힌 이야기이다. 그 누비처네로 첫 아이를 업고 처가댁에 다니러 가던 달밤을 눈에 선하게 표현해놓았다. 목성균의 글 속엔 우리네 고향이 살아 흐른다. 설날에 읽으면 더없이 좋은 글이다.

△‘안녕 주정뱅이’/권여선 단편소설집

서울 사는 수정이가 집 근처 강가에 그늘막을 치고 한나절 이 책을 읽는다고 올렸길래 ‘제목이 익숙한데 우리 집에 있는 책 같아.’라고 말하고, 그 날 밤 침대에서 읽으려고 꺼내와 폈다. 첫 장을 넘기는데 어째 익숙한 듯 한 배경과 인물들, 몇 장 더 넘기자 밑줄이 좍좍 그어져있다. 내가 읽었던 책이었다.

권여선의 글은 문장이 참 좋다. “분자에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놓고 분모에 그 사람의 나쁜 점을 놓으면 그 사람의 값이 나오는 식이지. 아무리 장점이 많아도 단점이 더 많으면 1보다 작고 그 역이면 1보다 크고.” 모든 인간은 1보다 크거나 작게 만드는 단순함, 그러나 절묘한 문장이 마음을 친다.

사람의 얼굴을 이렇게 표현하다니 또 놀랍다. ‘작은 눈, 작은 코, 작은 입에 광대뼈가 조금 도드라져 작은 언덕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 같은 느낌을 주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몇 장 넘기면 ‘문정은 그토록 이상한 눈빛을 누구에게서도 본 적이 없었다. 작은 언덕이 있는 작은 마을에 이제 아무도 살지 않아요, 하고 말하는 눈빛이었다.’

‘삶에서 취소할 수 있는 건 간 한 가지도 없다.’라고 썼다. 우린 살면서 약속도 얼마나 쉽게 취소하는가. ‘안녕 주정뱅이’ 속에 단편 하나하나가 조곤조곤 속삭인다. 읽는 내내 행복했다.

△‘악마의 사전’/엠브로스 비어스 지음

이 책은 다년간 잡지에 발표한 것을 모아 1906년에 간행한 책이다. 세상에 나온 지 100년도 더 된 책이다. 아직도 살아서 팔리는 책이니 고전의 반열에 올려야 하겠지만 고전목록에 이 책을 끼워 넣은 것을 보지는 못 했다.

이 책과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큰아이가 중학생이 되던 해에 나도 다시 대학생이 되기로 했다. 편입을 하고 강의를 들으며 조카뻘 되는 학우들과 공부를 하니 더 열심히 해야만 했다. 교수님이 하는 모든 말에 귀 기울이고 받아 적었다. 간간이 언급한 책 제목도 적어뒀다가 사서 읽었다. 그 중에 이 책의 제목도 있었다.

그날 집에 돌아와 얼른 검색해보고 주문했다. 작은 크기만큼 값도 저렴했다. 하지만 내용은 가격처럼 가볍지 않았다. 작가의 냉소적이고 예리한 시선으로 세상을 풍자한 낱말 풀이 책이었다.

지금에야 자신만의 사전이 넘쳐나지만 100년도 더 전에 이런 책을 썼다니 시대를 많이도 앞선 사람이었다.

단숨에 읽고는 다음 수업시간에 교수님께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고맙다고 인사를 드렸다. 자신이 말을 했었나 하시며 웃으셨고, 강의하면서 수많은 책을 말했을 텐데 그 책을 사서 읽었다고 감사인사를 하는 학생은 처음이라며 밥을 사주셨다.

그 후 나도 독서회 수업마다 이 책을 학생들에게 전파했다. 좋은 것은 많은 이들과 나눠야 더 좋은 법이니까.

△ ‘일생에 한번은 스페인을 만나라’/최도성 지음

10년 전 즈음, 스페인에 가고 싶어서 이 책을 읽었더랬다. 여행가이드북일 거라고 생각하고 샀다가 책장을 넘기면서 스페인과 세계의 역사가 들어있어서 놀랐다. 특히 내가 사실이라고 믿었던 일들이 사실이 아닌, 그래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어서 더 재밌었다.

그 중에 우리나라와 스페인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흔히 한국을 처음 방문한 사람이 풍랑을 만나 표류 중에 한국을 찾은 박연이나 하멜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실은 스페인 신부로 일본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군을 따라 1593년 조선 땅을 밟은 세스페데스 일행이다.

그는 편지로 로마교황청에 임진왜란과 거북선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철갑을 두르고 입에서 불을 뿜는 거북선이 백전백승하면서 일본군을 꼼짝 못하게 하며, 이순신 장군의 위업과 활약상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증명했다. 세스페데스의 고향인 스페인 라만차 지역 톨레도 근교의 비야누에바 데 알카르데테라는 마을에 가면 그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진해로’라는 거리도 있다.

스페인에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책을 읽게 했고, 책을 읽으며 그 마음을 다지자 드디어 나는 2017년 봄에 스페인 여행을 하게 되었다.

코로나도 곧 지나가리니, 그대 어디든 가고 싶다면 가고 싶은 곳에 관한 책을 사라. 곧 그곳에 가게 될 것이니.

/김순희(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