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대학시절을 돌이키면 맨 처음 떠오르는 것은 젓가락 장단과 거듭된 폭주(暴酒)다. 강의가 끝날 무렵이면 선배 가운데 한 사람이 쪽지를 보낸다. ‘고모집, 6시!’ 술집 이름치고는 정겨운 고모집이 우리 학과 아지트 비슷한 곳이었다. 막걸리와 빈대떡, 김치찌개, 제육볶음 정도가 주된 안주였다. 제육볶음은 특별한 일이 있어야 먹는 호사스러운 음식이었다. 가난했던 시절에 고기안주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으니 말이다.

자리를 잡으면 막걸리나 소주를 한 순배하고 누군가 흘러간 옛노래를 선창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노랫소리가 들리면 숟가락이나 젓가락을 들고 술상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당시 우리가 즐겨 부르고 따라 했던 노래는 예외 없이 뽕짝이었다. 요즘 고급스럽게 ‘트로트’라고 하지만, 나는 뽕짝이나 ‘도로토’ 같은 용어가 친숙하다.

뽕짝은 4분의 2박자가 주조를 이루는데, 속도가 장난이 아니다. 고복수의 ‘사막의 한’이나,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 정거장’ 같은 노래는 ‘폭스트로트’이기에 속도감이 배가된다. 그런 노래가 나올라치면 분위기가 한층 고조되기 마련이었다. 누군가는 운치 있게 ‘왈츠’나 ‘슬로 록’ 혹은 ‘탱고’ 같은 곡으로 분위기를 잡기도 했지만, 대세는 뽕짝이었다. 수준 높은 일부 선배는 ‘명태’ 같은 가곡으로 기를 죽이기도 했지만.

뽕짝을 함께 부르고, 정치 얘기에 치열하게 몰두한 적도 많았다. 유신정권 말기에 학교를 다녔기로, 세상의 모든 것이 고깝고 부정적으로만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술을 먹고, 강의 빠지고, 여기저기 쏘다니고, 염세주의에 함몰되어 20대를 마구 살았던 시절이었다. 성실하고 근면하게 공부했던 극소수의 대학생이 ‘범생이’ 딱지로 소외되고 고립되어야 했던 희한한 시대. 그 시대를 위로했던 흘러간 옛노래와 젓가락 장단 그리고 막걸리의 추억.

요즘 ‘트로트 열풍’이라고 한다. 일부 유튜브에서는 외국인 여성까지도 기막히게 트로트를 불러댄다.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K’로 시작하는 온갖 것이 세계 전역으로 팔려나가는 놀라운 시대를 경험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와중에 뽕짝이 불러온 향수는 대단한 것이다. 어린 친구들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흥얼거리는 뽕짝의 열풍은 분명 놀라운 시대상이다.

20대 10년을 학교에 다녔던 까닭에 나는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막걸리와 젓가락 장단과 뽕짝에 심취한 사람이다. 그 결과 수많은 노래와 곡조를 기억한다. 더욱이 남들의 노래를 듣기보다는 직접 노래하는 게 체질에 맞는다. 농촌에 사는 관계로 이웃에 아무런 방해도 주지 않고 노래 부를 수 있는 환경 또한 든든한 우군이다. 힘들고 지치고 괴로운 때가 오면 조용히 기타를 꺼내서 조율하고 노래한다.

한동안 국민 뽕짝이었던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을 3절까지 부르고 나면 속이 시원하고, 맺혔던 울혈(鬱血)이 풀리는 느낌이다. 두만강을 건너간 사람과 그이를 보내는 사람의 정한이 사무치게 다가오는 시대의 명편(名篇) ‘눈물 젖은 두만강’. 여러분은 3절 가사를 아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