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샘 신라 고분 유적과 대릉원의 전경.
쪽샘 신라 고분 유적과 대릉원의 전경.

신라의 옛 고도(古都)인 경주에는 지금도 과거 신라인들이 쌓아 올린 거대한 고분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거대한 고분들은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낭만을 느낄 수 있게도 해준다. 특히 신라 고분들 중 천마총 그리고 황남대총이 위치한 대릉원(大陵園)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직접 방문하거나 들어보았을 정도로 우리에게 친숙한 공간이다.

한편 이와 같은 거대한 고분들에서는 금관을 비롯한 화려한 금공예품들이 무더기로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더불어 이를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화려하고 찬란한 신라인들의 고분 문화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천마총과 황남대총이 있는 대릉원 바로 동쪽 편에는 현재에도 발굴조사가 한창 진행 중인 쪽샘 신라 고분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쪽샘 유적과 대릉원이 담장과 도로로 단절되어 있지만 본래는 하나의 묘역(墓域)에 속하는 곳으로 신라 왕경인들의 공동묘지로 이 일대가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쪽샘 유적의 고분들은 대릉원과 달리 과거 보존조치 구역으로 지정되지 못하였고 점차 상가와 민가들이 들어선 마을로 변하여 그 훼손이 심각하게 진행되었다.

 

쪽샘 유적 신라 고분의 분포 양상.
쪽샘 유적 신라 고분의 분포 양상.

이후 유적의 중요성에 비해 관리와 보존이 미흡하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이에 경주시는 ‘쪽샘 고분공원 조성사업’을 계획하고 2000년부터 이 일대에 대한 토지 매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7년부터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다.

경주 쪽샘 유적은 앞에서 이야기하였듯이 대릉원과 본래 한 묘역에 속하는 신라 왕경인들의 집단무덤 유적이다. 특히 신라의 대표적 묘제로 거론되는 적석목곽묘(돌무지덧널무덤)들이 집중 분포하고 있고 이외에도 목곽묘(덧널무덤), 석곽묘(돌덧무덤), 옹관묘(독무덤) 등 다양한 형태의 무덤들이 존재하고 있음이 지속적인 조사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2007년부터 현재까지 진행된 쪽샘 신라 고분 유적의 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적석목곽묘의 경우 봉분 직경이 30m 이상의 대형분(大形墳)이 있는 대릉원과 다르게 봉분 직경 10~20m의 중·소형분(中·小形墳)들이 집중되어 있는 특징을 보인다.

그리고 일정한 묘역을 가지는 대형분들과 달리 쪽샘 유적의 적석목곽묘들은 서로 근접하거나 중복되게 축조된 모습이다. 이러한 규모, 입지의 차이는 무덤 주인공의 생전 신분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신라 사회가 무덤의 규모나 입지, 조성방식에서 일정한 사회적 규제를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와 관련된 현상은 목곽묘 축조 양상에서도 그대로 관찰된다. 쪽샘 유적 일대에서 발견된 목곽묘의 입지는 적석목곽묘가 만들어지는 낮은 구릉 사면부(斜面部)나 주변부에 주로 위치하며, 그 규모도 길이 5m 이하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부장 유물도 적석목곽묘에 비해 양과 질에서 다소 떨어지는 것들이 많으며, 서로 중복되어 있는 양상이 뚜렷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적석목곽묘가 축조되던 시기 목곽묘는 아마도 적석목곽묘의 주인공 보다는 조금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사용하였던 묘제였음을 가정해 볼 수 있다.

정대홍학예연구사
정대홍
학예연구사

쪽샘 유적에서는 석곽묘와 옹관묘도 확인되었는데, 전체 무덤 중 그 수량이 많지 않고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아마도 목곽묘의 주인공보다 더 낮은 신분의 사람들의 무덤으로 보인다.

이러한 쪽샘 유적의 고분 분포양상은 얼핏 작은 무덤들 혹은 화려한 금공예품(金工藝品)이 없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신라 고분 연구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일반적으로 고대 사회의 지배자들은 거대한 봉분과 다량의 부장품, 우월한 입지 등을 통해 자신들의 위세를 과시하려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천마총이나 황남대총과 같은 무덤의 주인공을 당시 사회에서 최상위 지배층일 것이다. 반면 이보다 규모, 입지, 부장품 등이 다소 떨어지는 쪽샘 고분의 주인공들은 당시 사회에서 이들보다 더 낮은 계층이었을 것으로 설정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쪽샘 유적의 신라 고분들은 당시 신라 사회의 계층성과 이에 따른 일정한 규제 등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로 작용한다. 즉 고분에 투영된 입지, 규모, 부장품의 차이를 통해 당시 신라 사회의 신분적 차별성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나아가 신라 왕경 내 중심 고분의 형성과 전개 그리고 경관 복원에 있 쪽샘 유적은 신라 고분 연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