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선택을 하게 된다. 이걸 먹을까, 저걸 입을까, 어느 쪽으로 갈까, 누굴 만날까 등 어찌보면 사람의 모든 행위나 생활 자체가 모두 선택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반사적이나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도 수두룩하지만, 할까 말까 또는 갈까 말까 처럼 순간의 판단이나 이미 마음먹은 선택에 따라 몸을 움직이고 행동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먹거나 말하고 행동하는 자체는 순전히 그 행위자의 생각과 의사에 따라 나타나는 결과물인 셈이다.

어떤 현상이나 일을 두고 생각에 따라 긍정과 부정이 대립되고, 찬성과 반대가 양립할 수 있다. 그것은 곧 개개인의 마음먹기와 관점의 차이에서 오는 일반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나와 생각이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은 아닌 것이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상대를 무시하거나 배척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소중하면 남도 귀중하듯이,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이야말로 인간관계의 기본이고 중요한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숱하게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두 충족시켜 주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인간사회에서의 예의와 범절을 알고 기본과 상식을 지키는 것은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도리가 아닐까 싶다.

모든 일에는 반대급부가 따르기 마련이다. 이쪽이 잘 되면 저쪽이 잘 안될 수 있고, 한쪽이 손해보면 다른 쪽은 이득을 볼 수도 있다. 그것은 곧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 어떤 사안에는 명암이 존재하고 유불리가 상존하는 것이 다반사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대하고 받아들이냐는 관점과 태도, 자세에 따라 결과가 확연하게 차이가 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똑같은 일이나 현상을 놓고도 ‘~때문에’ 힘들고 어려워졌다 하기도 하고 ‘~덕분에’ 힘이 나고 수월해졌다 하는 부류가 나타나게 된다.

어떤 일의 원인이나 까닭을 의미하는 ‘때문’은 부정, 긍정적 맥락에서 모두 쓰이지만 부정성이 많고, 베풀어 준 은혜나 도움을 의미하는 ‘덕분’은 자연히 긍정적으로 의사를 표시하는 경우에 쓰이게 된다. 즉, 때문에는 구실이나 핑계로 삼아 원망하거나 나무라는 일을 뜻하는 ‘탓’이라는 의미가 강하고, 덕분에는 수긍하고 호응하는 자세로 감사하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고 할 수 있다.

희대의 전염병 때문에 사회전반의 양상이 판이하게 달라졌지만, 언제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만 탓하고 경기침체를 한탄만 할 것인가. 암울한 난관에 직면해서 마음을 다잡고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지방의 모방송에서는 지역의 대기업체 때문에 야기되는 환경, 질병 등의 사회적인 문제를 명확한 인과관계와 진실규명도 하지 않은 채 여과없이 파헤치고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있는 듯하니 무슨 의도와 뒷북인지 모를 판이다.

가뜩이나 민감하고 조심스런 시기에 누구 때문에 무슨 탓(?)을 하기 보다는, 대승적인 차원에서 덕분에 다행스럽고 안심하다는 선의적인 발상과 전향적인 맥락으로 막막한 위기를 함께 극복해 나가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