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문화재연구소의 신라 속 ‘숨은그림찾기’ 3

경주의 목관묘와 부장품. /영남문화재연구원 제공

고고학에서는 흔히 시대를 도구의 재료로 구분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획기적이었다고 판단되었던 돌(석기), 청동(청동기), 철(철기)이 그것이다.

청동은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이는 인류가 자연 그대로가 아닌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 이전과 완전히 다른 차원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철보다 앞선 청동기의 제작은 한국 청동기시대를 열며, 청동기문화를 꽃피웠다.

또한 그 이후인 초기철기·원삼국시대까지 사용되고, 일본에 전파되기도 했다.

한반도 전역에 넓게 분포한 청동기는 동남부지역의 경주에서도 확인되는데 여기에서는 이를 살펴보려 한다.

경주의 청동기는 대부분 원삼국시대에 집중돼 출토됐고 우리는 국립경주박물관 등에서 그 실체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선 시기에 특이한 사례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경주 출토로 전하는 견갑형동기(肩甲形銅器, 일제강점기 수집)이다.

이 견갑형동기는 단독 출토로 용도가 불명확한데 이와 비슷한 것이 중국의 심양 정가와자 6512호묘(1965년 8월 발굴)에서 확인된 바 있다. 여기 무덤 안 인골의 오른쪽 경골(정강이뼈) 옆에서 견갑형동기가 나왔는데 그 내부에 동부(銅斧·도끼)와 동사(銅<9248>·새기개)가 들어 있어 이를 넣어 보관하는 용도로 해석된다.

경주의 견갑형동기는 현재 일본 동경국립박물관에서 소장 중이고 복제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이 유물은 흥미롭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해석하는 데는 부족함이 있다. 오히려 전형적이라 말할 수 있는 유적의 청동기에서 당시 사회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할 수 있겠다.

경주에는 그러한 유적들이 여럿 있다. 대표적으로 입실리(1920년 8월 발견), 구정동(1936년, 1951년 10월 발견), 조양동(1979년 4월 발굴), 사라리(1995년 11월 발굴), 덕천리(2004년 6월 발굴), 탑동 21-3·4번지(2010년 2월 발굴), 죽동리 639번지(2018년 8월 발굴) 유적 등이다.

이들 유적은 대부분이 목관묘이며, 청동기 외에 철기, 구슬 등도 나왔다.

경주의 목관묘는 기원전 2~1세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하는데 이때 새로운 집단이 청동기를 가지고 온 것으로 보인다. 이중 2기의 무덤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기원후 1~2세기는 고고학에서 원삼국시대, 사학에서 삼한시대라 부르는 시기에 속한다. 이때 만들어진 두 무덤이 경주 사라리 130호 목관묘와 탑동 목관묘이다.

이들 무덤은 초기철기시대가 끝난 후 만들어진, 즉 원삼국시대 진한의 지배층 무덤으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청동기와 철기가 다량 부장됐는데 흥미로운 점은 한국식동검(세형동검)이 이들 무덤에서 발견됐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때까지도 한국식동검은 경주(진한)에서 중요한 권력의 상징물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흥미로운 부분은 사라리 130호 목관묘와 탑동 목관묘의 부장유물들이다.

도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한국식동검, 청동거울, 호랑이모양 허리띠, S자 모양의 재갈, 나무를 끼울 수 있는 철제의 창, 양쪽 손잡이 달린 항아리 등 두 무덤에는 거의 같은 물건들이 묻혔다.

이러한 유사한 유물이 공통적으로 부장된 사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더군다나 이처럼 다양하고 많은 수의 유물들이 나온 무덤은 더더욱 그렇다.

허준양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
허준양
경주문화재연구소 연구원

비슷한 시기, 같은 지역 안 15km 가량 떨어진 위치, 공통된 부장품들은 어쩌면 진한의 사로국 여러 지배자들을 떠올린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에 대한 논의는 꾸준히 있어 왔으나 아직까지 확증은 발견되지 않았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경주 탑동 목관묘의 청동거울에서 왕(王 또는 主)명의 문자가 확인됐다. 우리는 이 한 글자를 통해 여러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 王은 진짜 왕을 말하는 것일까? 또는 진한의 지배자(또는 장수)를 표현하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단순한 글자인가? 만약 이 글자가 진짜 왕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탑동 목관묘의 주인은 왕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비슷한 시기, 비슷한 수준의 무덤에 묻힌 사라리 130호 목관묘의 주인은 또 누구라고 할 수 있는가? 이렇듯 고고학은 역사문헌만으로 알 수 없는 단서를 찾아내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음을 확인하게 한다.

다시 말해 경주에는 아직도 풀지 못한 이야기들이 잠들어 있는 것이다.

보통 ‘경주’의 이미지는 신라의 고분들과 화려한 금관, 금귀걸이와 맞물려 있다.

그러나 이 글을 읽은 독자들은 그에 더해 청동기와 밝혀지지 못한 수많은 이야깃거리도 함께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