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 그림이 그려진 2020년 달력.

읽은 책을 꺼내 넘기니 책이 저 혼자 알아서 한 쪽을 펼쳐 준다. 구멍 뚫린 영화 티켓이 사이에 껴 있다. 그 영화를 보았을 즈음에 읽은 책이라고 내게 귀띔하고 있다. 또 다른 책을 펼치면 언젠가 친구랑 먹었던 점심값 영수증이 들어있다. 누군가에게서 받은 명함이, 마음을 사로잡았던 신문의 칼럼이, 새로운 종이돈에 밀려 사라진 천 원짜리가, 도서관 옆자리에서 친구가 건네던 쪽지가 책 속에서 튀어나와 지나간 그날의 추억을 들려준다. 책갈피는 문득문득 지나간 일을 들려주는 일기장이다.

오랜만에 간송 전형필 일대기를 꺼내니 하얀 입장권이 그 속에 잠자고 있다. 터키 여행 중에 데린구유 지하도시 입장권을 보고 순간 머리가 띵했다. 여느 입장권에 있는 사진 하나 없이 하얀 바탕에 지명 하나만 달랑 적어 놓은 터키 정부의 자신감을 보고 한동안 감탄했었다. 데린구유의 멋진 모습을 떠벌리지 않아도 된다는 자부심이 그 하얀 백지 입장권이 말해주고 있었다. 대부분의 티켓은 가방 속 어딘가에 구겨 넣었지만 그 표만은 버리지 않고 여행길에 읽던 책 사이에 끼워 내가 읽은 만큼을 표시했었다.

나는 책갈피를 사거나 선물 받고도 사용하지 않는다. 성격이 꼼꼼하지 못해 어디에 놔두었는지 정작 필요할 때는 내 손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에 잡히는 영수증이나 메모지가 책갈피를 대신한다. 책을 다 읽고는 받을 때 아무 생각 없었던 것처럼 무심히 넣어둔 채 덮어 버린다. 오랜만에 책갈피를 보니 그 날, 그 여행길, 그 영화, 그 기찻길이 펼쳐진다. 지난 일기장을 넘겨보는 것 같다.

지난 가을, 친구들과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가방에서 어젯밤 읽은 수필집을 꺼냈다. 동행한 친구들에게 밑줄 친 문장을 읽어주며 내가 느낀 기쁨을 전하려고 했다. 책장을 넘기자 책갈피가 끼인 곳이 펼쳐졌다. 순간, 옆자리에 앉았던 친구의 손이 책갈피로 향했다. “이거 내꺼지 싶은데?” 하며 손때 묻은 꽃무늬 책갈피를 앞뒤로 넘기며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책갈피를 얼른 빼앗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나머지 친구는 박장대소를 했다.

김순희수필가
김순희
수필가

도서관에서 한옥에 관한 책을 빌렸었다. 책을 펼치자 그 사이에서 문제의 책갈피가 들어 있었다. 예쁜 꽃그림이 있고, 뒷면에 숫자가 있는 걸 보니 누군가 달력의 그림을 오려서 만든 수제 책갈피였다. 귀퉁이가 낡은 것을 보니 오래 간직한 듯 했다. 이런 센스 있는 사람이 누굴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마음에 쏙 드는 것이라 책만 반납하고 책갈피는 내가 가졌다. 그런데 여기서 그 주인을 만나다니, 친구는 꽃그림이 있는 달력을 보면 자주 오려서 책갈피를 만들어 둔다고 했다. 그 후 나는 전시장에 갈 때면 팸플릿을 꼭 챙긴다. 화사한 그림이 나오도록 오려서 독서회 회원들에겐 책갈피로, 지인들에게는 선물상자 속에 메모장으로 썼다.

연말에 달력을 주는 이가 있으면 명화나 꽃 사진이 들어가 있는 것이면 넉넉히 챙긴다. 2020년 달력 중에는 친정집 달력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물방울을 그리는 화가 김창렬 화백의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딸이 좋다고 너스레를 떠니 금방 벗겨서 가져가라고 하셨다. 달력에 숫자를 보는 게 목적이 아니니 1년 동안 걸어두고 보다가 해가 지나면 달라고 했더니, 잊지 않으시고 챙겨 보내셨다. 몇 장은 작은 액자에 넣어 친구에게, 몇 장은 책갈피를 만들어 새해 만나는 이들에게 나눠주려고 한다. 며칠 전 김창렬 화가가 돌아가셨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었다.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책갈피를 만든다. 가위를 들고 하나씩 오릴 때마다 받을 사람 이름을 떠올리며 혼자 행복해 한다. 받는 사람보다 주는 내가 더 기쁜 작업이다.

수필집에 있던 낡은 꽃그림 그것은 내가 지켜냈다. 지금도 그 책갈피는 내 일기장 한 쪽을 장식하고 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면 내가 만든 꽃갈피 하나씩 챙겨 넣으려 한다. 누군가에게로 가서 그 사람을 미소 짓게 할 수만 있다면 그때 내가 훔친 책갈피 값을 치르는 일일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