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길수<br>수필가
강길수
수필가

몇 해를 망설였다. 일을 미루는 버릇이, 삶에 큰 마이너스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불치병처럼 고치지 못했다. 이번에는 자신뿐 아니라, 한 생명에게 큰 잘못을 하고 말았다.

접이식 작은 톱을 들고, 몇 년 동안 미루던 일을 하러 간다. 그 생명 앞이다. 낮은 밭둑에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던 터라, 제법 늠름하다. 행사 때 묵념하듯 속말로 사전 고해성사를 한다. “소나무야, 미안하다. 이제 더는 너를 여기에 둘 수 없구나. 어릴 때 옮겨 주지 못해 더 미안하다. 부디, 다음 생은 좋은 곳에 자리 잡으렴….”

사람이라면 아동기에 해당할 소나무다. 밑동 둘레가 두 손으로 움켜잡으면 굵기가 조금 남을 정도로 컸다. 밑동에서 허리춤 정도 올라가면 원줄기가 두 개로 갈라졌다. 톱날을 소나무 밑동에 들이민다. “쓱싹쓱싹….” 톱날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소나무의 몸을 자르기 시작한다. 아는지 모르는지 소나무는 반응이 없다. 순한 양같이 자신을 내맡기고 있다 싶기도 하다. 아니, 소나무는 비명 지르며 절규하는데, 사람인 나는 알아듣지 못하고 있지는 않을까. 소나무가 내는 비명소리와 내가 알아듣는 소리의 주파수가 달라서 말이다. 톱날이 톱밥을 밖으로 뱉어내자, 소나무가 속에 간직한 비밀의 향내가 번져 나왔다. 실로 오랜만에 맡아보는 냄새다. 군 제대 후, 고향에서 한 해 가량 취업 준비 겸 농사일을 도우며 지냈다. 그때 산에 나무하러 가는 길에, 방해되는 가지를 톱으로 자르며 맡아 본 뒤 처음이다.

두 팔은 열심히 톱질하는데, 마음속은 복잡하다. 이 생각, 저 생각이 다 들기 때문이다. 네가 예전 시골서 자랐더라면 멋진 디딜방아의 방아채와 다리로 쓰였을 텐데 아깝다든가, 베어낸 너를 텃밭 어디에 쓸데는 없을까 하는 궁리, 하필 좋은 산 다 두고 밭두렁에 나서 무지막지하게 요절을 당하니, 너도 참 박복하다는 둥 여러 생각이 꼬리를 문다. 부모 소나무들이 사는 산까지는 직선거리로 200m는 될 터다. 한데, 솔방울 안 씨앗의 작은 날개로 예까지 날아왔다고 생각하니 믿기지 않는다.

밑동을 다 베자, 소나무는 밑 밭이랑으로 속수무책 쓰러졌다. 앞길이 창창한 소년 소나무의 생이, 인간인 내 욕구에 따라 마감되는 모습이다. 이 소나무의 씨앗은 무슨 뜻으로, 바람 타고 이 먼 곳에 정착했을까. 자연은 하늘의 뜻을 따를 터. 그렇다면 하늘이 경영하는 자연 질서란 뭐란 말인가. 뒷정리를 위해 가지들을 쳐내고, 둥치도 들어 치울 수 있을 정도로 잘랐다. 떨어진 솔방울들을 모아 건너편 언덕으로 던졌다. 그냥 두어 이곳에 또 나면, 다시 뽑아내거나 옮기거나 베어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두 주 만에 텃밭에 다시 왔다. 자른 소나무 밑동이 궁금해 그곳에 갔다. 덮어 두었던 작은 솔가지를 들어냈다. 잘린 단면이 보기 미안해 나도 모르게 덮었었다. 나이테를 살펴보았다. 분명하지 않은 부분이 있지만, 오륙 년은 되어 보였다. 잘린 껍질과 줄기 사이에선 송진이 눈물로 배어 나오고 있다. 가슴이 짠했다. 낮은 곳에 쌓아둔 가지들에게 눈이 갔다. 역시 푸르다. 잘린 둥치는 푸른 가지에 덮여 보이지 않는다. 어디선가, ‘이 슬픈 나무에 새 생명을 부여하는 방법 곧, 다른 쓰임새로 부활시키는 방법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번쩍 났다. 머릿속의 알고리즘이 빨리 회전한다.

‘그래. 크리스마스가 얼마 안 남았구나. 예쁜 가지를 가져다가 살아있는 성탄 트리를 만들자. 트리에 꽃과 눈, 별을 장식하여 손자들에게 보여주자.’ 하는 아이디어가 뒤이어 떠올랐다. 쉬는 화분에 어울릴 가지 두 개를 골랐다. 아이들 성장하고 나서부터 집에 거의 성탄 트리를 마련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올해, 오랜만에 플라스틱 나무가 아닌, 산 소나무 가지로 트리를 세우고 솜과 조화 등으로 아담하게 꾸몄다.

비록 작은 가지 둘이지만, 소나무는 새 생명으로 우리 집 거실에 되살아났다. 땅속 물과 공기와 햇빛으로 사는 생명은 끝났다. 하지만, 소나무는 사람들에게, 성탄과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는 살아있는 성탄 트리로 부활하였다.

크리스마스 날, 부활한 성탄 트리 위로 푸른 별빛 한줄기 찾아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