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

학문으로서의 미술사는 그 역사가 길지 않지만, 미술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거의 맞먹을 정도로 오래됐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미술은 사람에 대해 많은 것들을 이야기 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미술사가 먼저 살펴보는 대상은 미술작품이지만, 미술작품을 통해 진짜 관찰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과 ‘시대’이다.

미술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시각적 창작물이다. 음악이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를 창작한다면, 미술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이미지를 창작한다. 물론 이러한 구분도 지금에 와서는 모호해져 버렸다. 장르간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또한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미술은 늘 모습을 바꾸며 어디론가 흘러가기 때문에 하나로 잡아 놓을 수 없다. 사람이 변하고, 시대가 변하듯, 미술도 변한다.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 책이나 설명을 참고하곤 한다. 도움은 되겠지만 설명을 통해 작품을 보려는 잘못된 습관이 몸에 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글은 정보를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전달해 주는 장점이 있지만 의미를 제한해 버리는 한계가 있다. 우리가 미술을 보는 목적은 지식이나 정보습득에 있지 않다.

미술을 본다는 것은 미술가들의 눈을 통해 세계를 본다는 뜻이다. 미술가의 눈을 통해 세계를 보기 위해서는 몇몇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먼저 벗어나야할 편견은 시각적 익숙함이다. 예컨대, 시각적 익숙함은 사과가 빨갛거나 초록이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림 속 사과가 꼭 그런 색일 필요는 없다. 미술가는 원하기만 하면 진짜 보다 더 진짜 같은 사과를 그릴 수 있다. 하지만 그림 속 사과가 실제 사과를 모방하기만 한다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 오히려 현실에서 불가능한 사과가 더욱 흥미롭다.
 

프랑스 파리 루이뷔통 미술관.
프랑스 파리 루이뷔통 미술관.

또 하나의 편견은 지식이다. 모든 지식이 편견은 아니지만 고정되고 확고한 신념은 편견일 가능성이 높다. 우물 안에서 바라본 하늘이 하늘 전체일 수 없다. 보고 싶은 대로 짜 맞춰 보려하거나, 알고 있는 지식을 미술에서 확인하는 것에 만족해서는 미술의 참맛을 즐길 수 없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태도를 버려야 보는 것이 즐거워진다.

아주 자주 미술가의 유명세가 미술작품 보는 것을 방해한다. 유명한 미술가의 이름 보다 더 설득력 있는 무기는 없다.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몇 개의 선이 유명한 미술가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순식간에 그것은 걸작처럼 취급된다. 여기에 전문가들이 합류해 그럴싸한 양념을 뿌린다. 검증할 수도, 반박할 수도 없는 미사여구로 극찬이 이어진다. 이 같은 논평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검증하는 것은 불필하다. 이것은 유명한 미술가가 그은 선이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그 이름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것은 위선이거나 거짓이다.

작가의 유명세와 함께 작품 보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작품의 유명세이다. 미술과 상관없는 수많은 스토리가 루브르의 ‘모나리자’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으로 만들었다. 장사진을 이룬 인파 속에서 모나리자를 감상하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모나리자의 실물을 확인하고 싶은 이유는 단지 이 그림이 유명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파리 루이뷔통 미술관.
프랑스 파리 루이뷔통 미술관.

특정 작품에 유명세를 입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신기록을 달성한 천문학적인 작품가격이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라든지, ‘한국 미술품 최고가’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일순간 유명세를 탄다. 작품과 작품의 가격이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누구도 작품성을 정확히 계산해 작품의 가격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비싼 작품이 꼭 훌륭한 작품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일일이 다 언급할 수는 없지만 미술을 둘러싼, 하지만 미술 그 자체와는 무관할 수 있는 편견들이 너무나 많다. 이것들을 하나씩 걷어내 버리면 미술이 조금씩 더 선명하게 보인다. 미술 자체가 선명하게 보일수록 보는 즐거움은 더욱 커지게 된다.

/김석모 미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