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마음’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정채봉 지음·샘터출판사 펴냄
산문집·시집. 각 1만3천원

故 동화작가 정채봉. / 샘터 제공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먼저 창을 열고 푸른 하늘빛으로

눈을 씻는다.

새 신발을 사면 교회나 사찰 가는 길에

첫 발자국을 찍는다.

새 호출기나 전화의 녹음은 웃음소리로 시작한다.

새 볼펜의 첫 낙서는 ‘사랑하는’이라는 글 다음에

자기 이름을 써본다.

새 안경을 처음 쓰고는 꽃과 오랫동안 눈맞춤을 한다.”-정채봉 시집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중

‘첫 마음’‘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동화작가 고(故) 정채봉(1946~2001)의 20주기를 기념한 책 두 권이다.

고인의 타계 20주기를 맞아 그가 젊은 시절 근무했던 직장인 샘터 출판사에서 기념해 최근 펴냈다.

각박하고 고된 현실에서 많은 사람이 본래 마음,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세속적 욕망에 사로잡혀 고통에 빠지게 된다고 여긴 동화작가 정채봉은 자신의 글로써 삶에 그을린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고 위로하고 싶어 했다.‘성인 동화’라는 새로운 문학 용어를 뿌리내리며 한국 문학사에 깊은 발자취를 남긴 그는, 동화라는 장르적 틀을 넘어 놀라운 창작열로 소설, 시, 에세이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산문집 ‘첫 마음’은 생전에 정채봉이 펴냈던 ‘그대 뒷모습’,‘스무 살 어머니’,‘눈을 감고 보는 길’,‘좋은 예감’네 권의 산문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들을 엄선해 한 권으로 엮은 에세이집이다. 그가 평생 문학적 화두로 삼았던 마음, 삶에 대한 의지, 사람, 자연을 주제로 한 수필들이 실렸다.

 

첫 번째 장‘슬픔 없는 사람 없듯’에서는 살면서 얻게 되는 마음의 생채기를 보듬으며, 단단하면서도 겸허한 마음을 가꾸는 일에 관해 이야기한다. 두 번째 장‘별빛에 의지해 살아갈 수 있다면’에서는 간암 판정을 받은 후 병상에서도 삶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며 여전히 형형한 필체로 삶을 반추하는 자기 성찰적인 면모를 만날 수 있다. 세 번째 장 ‘흰 구름 보듯 너를 보며’에서는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 이해인 수녀, 피천득 수필가 등 당대 거목들과의 교감에서 얻은 인생의 지혜를 섬세하게 붙들어 놓는다. 더불어 유년 시절을 지켜줬던 할머니, 그리고 곰보 영감님, 문경의 농바윗골 사람들 등 주변 사람들의 평범한 순간에도 감동하는 인간 정채봉의 마음이 실려 있다. 마지막 장‘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에서는 자연 앞에 한낱 인간으로서 겸양과 자연스러운 삶을 추구하는 그의 태도가 담겨 있다.

시집은 정채봉이 남긴 유일한 시집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개정 증보판이다. 그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남긴 유작이기도 하다.

정채봉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며 메모지나 찢어진 쪽지에 펜으로 쓴 시들을 지인인 정호승 시인에게 건넸고, 이를 엮은 책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이 됐다.

정채봉은 ‘성인 동화’, 그러니까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장르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표작‘오세암’이 프랑스에도 소개됐다. 첫 장부터 명성에 맞는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세상에 대한 통찰력, 담백하고 간결한 언어로 수많은 독자의 마음을 다독였던 정채봉. 그는 늘 자신이 발견한 삶의 순수를 이야기하고, 자분자분한 걸음걸이와 말투에서는 자신을 낮추는 겸양이 드러났다. 그가 많은 이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은 것은 어쩌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마음이 시리고 답답한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지혜와 위안을 그의 글에서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