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세 콘서트 끝나고 오는길에 받은 문자.

아들 둘에게 ‘별이 빛나는 밤에’ 하면 무엇이 떠오르냐고 물었다. 큰아이는 ‘이문세’라고 했고, 그림을 배운 둘째는 고흐라고 했다. 큰아이에게 너도 라디오를 듣냐고 했더니 그 세대는 아니지만 문득 떠올랐다고 하니 별밤지기 이문세의 영향력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별밤을 오래 들었던 엄마의 어깨너머로 들은 추억담이 한 몫 했을 것이다. 여고시절을 별밤과 함께 보냈다. 야자를 끝내고 집으로 오는 버스에서 듣다가 집에 오자마자 라디오를 켜고 옷을 갈아입고 책상 앞에 앉아 또 들었다. 숙제를 할 때도 소설을 읽을 때도 내 생활의 OST처럼 들려오는 소리였다. 물론 내가 들은 것은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아닌 포항MBC의 별이 빛나는 밤에였지만.

엽서를 써서 보내놓고 내 엽서가 읽혀지길 기대하며 라디오에 귀를 붙이고 들었다. 반 친구들을 소개하는 내용을 써서 보낸 것이 방송을 타면 그 다음날 아침 교실은 엽서이야기로 채워졌다. 예쁜 엽서를 뽑아 전시회도 했었다. 한 번 뽑혀 보겠다고 마음먹고 아이디어 짜는 데만 며칠을 보냈다. 친구들의 캐릭터를 고양이로 바꿨다. 느릿한 잠꾸러기 고양이, 하이틴 로맨스만 파는 고양이, 손톱을 물어뜯는 고양이, 그리고 열심히 라디오에 덕질하는 고양이 나. 관제엽서 두 장을 세로로 붙여서 네 마리 고양이를 그렸다. 파스텔에 물을 묻힌 붓을 문질러서 그리면 수채화느낌이 나는 그림이 된다. 그리고 옆에 재미난 설명을 붙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일요일 오후에 대문이 열리면서 나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전보가 왔다는 것이다. 우체부 아저씨 복장이 아닌 평복이어서 긴가민가했다. 예쁜 엽서전에서 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주셨다. 전보라는 것을 처음 받아봤다. 봉투도 없이 길게 찢어진 종이에 타이프로 쳐서 온 내용은 은상을 받았으니 몇날며칠까지 시상식에 참여하란 소리였다. 너무 아쉽지만 학교 가는 날이라 못 갔다.

김순희수필가
김순희
수필가

지나고 보면 그때 갈 걸, 무려 시상자가 조용필이었다는데 말이지.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하루쯤 빠져도 내 인생에 아무탈도 없을 일이었는데, 시상식에 가는 것이 더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일이었는데 그땐 몰랐었다. 주말에 방송국에 가서 상을 전해 받았다. 표창장과 부상으로 커다란 헤드폰을 주었다. 용필오빠의 사인도 들어있었다. 잦은 이사로 지금은 사라져버린 물건들. 별밤을 방송하는 DJ를 별밤지기라고 한다. 이는 이문세가 DJ 시절 한 청취자가 ‘등대지기’라는 말에서 창안하여 엽서로 제안한 것으로 이문세가 수용한 것이라고 한다. 1969년 3월 17일에 처음 편성되었으며 무려 52년째 방송 중인 MBC의 최장수 프로그램이다. 지금은 상상이 잘 안 가지만, 처음 편성 당시에는 청소년 교양 진작 차원의 명사와의 대담 프로그램이었다. 3대 별밤지기로 당시부터 유명 DJ였던 이종환이 들어서면서 음악 방송으로 전환했다.

당시 이문세의 별명은 ‘밤의 문교부장관’이었지만 포항에서는 아쉽게도 공개방송을 들려주는 날만 서울방송이 들렸을 뿐이다. 그래도 이문세는 별밤지기이면서 내 학창시절을 채운 음악 자체였다. 이문세 4집 테이프를 카세트에 넣으면 앞뒷면이 자동으로 돌아가며 밤샘 공부에 동행 해 주었다. ‘어허야 둥기둥기’가 나오면 한 바퀴 다 돌았구나 싶었다.

이문세 콘서트를 포항에서 한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두 장의 표를 예매했다. 같은 세대를 살았던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렸지만 다들 시간이 안 맞았다. 이틀 전까지도 함께 갈 친구가 없었다. 슬그머니 남편에게 당신을 위해 준비한 표라고 하며 가자고 꼬셨다. 흔쾌히 따라 나섰다. 나는 내내 서서 몸을 흔들며 괴성을 질렀고, 남편은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공연을 찍는다며 내 옆자리를 피했다. 공연 시작 전에 문자를 보내면 문세 오빠가 공연도중 읽어준다 해서 나도 보냈고 내 사연이 읽혔다. 노래제목 소녀를 숙녀로 보내서 누군지 얼굴을 보아야겠다고 해서다. 창피했지만 더 즐거운 추억으로 곱씹게 되었다. 별이 유난히 빛나는 오늘 밤에 문세오빠 노래를 꺼내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