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어느 신부님을 알고지낸지는 꽤 오래되었다. 1980년께, 40년 지났으니 세월이 많이 흘렀다. 우연히 성당 옆 어느 포장마차에 함께 한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포장마차에는 술안주로 참새구이까지 나오는 낭만적인 시절이었다. 신부님의 신자들에 대한 격식 없는 태도가 무척 좋았다. 그 날 포장마차에서는 그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가 무척 재미있었다. 그날 밤 신부님과 함께한 시간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 후 그 신부님은 다른 성당으로 떠나버렸다. 몇 년 후 그 신부님이 선교 목적으로 러시아 오지로 떠났다는 소문만 들렸다.

오늘 이야기는 그 신부님의 러시아 체험 이야기다. 1990년대 초 러시아는 사회주의 소련이 무너지던 시기였다. 당시 러시아인들은 한국서 온 자그마한 신부님에 무척 호기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종교행사조차 보기 힘든 그들은 검은 옷을 입은 신부가 매우 수상했던 모양이다. 어떤 러시아인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묻더란다. 그는 엉겁결에 선교 사업은 감추고 남을 돕는 일을 한다고 대답했단다. 그들은 이상한 눈으로 보면서 당신은 사기꾼이 아니냐고 의심했단다. 당과 혁명, 지도자를 위해 살아온 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다시 러시아인이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사느냐고 묻더란다. 그는 (예수님처럼) 남을 사랑하기 위해 산다고 대답했단다. 구체적으로 누구를 사랑하느냐 묻기에 모든 사람이라고 대답했단다. 여성들도 포함되느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했더니 ‘당신은 바람쟁이구먼’하고 웃더란다.

무신론적 가르침에 따라 살아온 그들이 종교적 사랑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러시아는 공산당이 인정한 러시아 정교는 남아 있었지만 신앙인은 찾아볼 수 없는 사회였다. 더욱이 종교의 자유가 금지된 땅에서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얼마 후 친밀감이 생긴 러시아인은 신부님께 무엇으로 생활하느냐고 묻더란다. 한국에서 보내온 신자들의 헌금으로 생활한다고 대답했단다. 그들은 이 대답에는 더욱 눈이 휘둥그레지더란다. 그들은 자신이 노동하지 않고 남의 돈으로 살아가는 당신은 ‘흡혈귀’라고 핀잔까지 주었단다. 노동 가치에 따라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고 가르치는 그들로서는 남의 돈으로 살아가는 사제의 생활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자본주의는 노동자를 착취해 살아간다고 교육을 받은 그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일는지 모른다.

종교를 부정하던 소련은 벌써 30여 년 전 붕괴됐다.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배척하던 러시아인들은 오늘날 공산주의까지 배척해 버렸다. 그들은 빵문제도 해결치 못하는 사회주의를 포기해 버리고 자본주의 노선을 선택한 것이다. 내가 자주 찾은 러시아는 시장경제로 넘어온지 오래지만 관료적 독점과 독재라는 사회주의 구태는 그대로 남아 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선전하던 땅에 러시아 정교회는 소리 없이 확산되고 있다. 그때 러시아 선교를 위해 고생했던 신부님은 귀국했지만 아직도 그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