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손경찬의 대구·경북 人
타묵 퍼포먼스 창시한 율산 리홍재

리홍재 씨는 서예는 춤과 리듬이 있는 음악이고, 회화는 경음악이라고 말한다.
리홍재 씨는 서예는 춤과 리듬이 있는 음악이고, 회화는 경음악이라고 말한다.

타필비묵(打筆飛墨).

대구에 기인이 있다. 일필휘지로 먹을 치고, 서예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어 훨훨 날게 한 사람. 그가 바로 붓으로 먹을 친다는 ‘타필비묵’의 타묵 퍼포먼스로 명성이 높은 율산 리홍재 명인이다. 대구 경북의 명인을 찾아 인터뷰를 하며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지역 각계각처의 예술 방면에 기인들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율산을 만난 첫 느낌은 진짜 광대를 만났다는 신선한 놀라움이었다. 그의 내면에서 꿈틀대는 행위예술의 범주를 예측할 수 없고, 그 자유로움의 한계를 짐작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는 내가 그 동안 인터뷰로 만난 여러 아름다운 광대 중에서 단연 으뜸이다. 온몸에 가시를 담은 밤산. 그 내면에 숨어 있는 진정성을 알리는 방법은 밤산을 이루는 알을 깨뜨릴 수밖에 없고, 알을 깨뜨리는 방법으로 그는 타묵 퍼포먼스를 택했다.

말과 글을 굵은 획에 담아 그림인 듯 붓을 치며 자연의 매개물을 화선지에 생생하게 담아내는 방식이 율산에게는 알을 깨뜨리는 행위나 다름없다. 서예를 단순히 사각 프레임에 가두는 전통을 뛰어넘어 세상으로 끌어낸 것은 기존의 질서를 넘어서는 일이기도 하지만 두터운 자기만의 세계를 깨고 세상으로 걸어 나오는 과정이기도 하다. 진정성을 향한 그의 행보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언제부터 서예를 하셨어요?”

“어릴 때부터. 초등학교 5학년?”

어릴 때부터 한자를 좋아해서 한자사전을 갖고 놀았다. 한자를 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할아버지가 서당을 하셨지만 그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의 공부는 완전한 독학이다. 학과공부보다 글씨 쓰기가 좋았고, 그 유별난 취미생활이 그대로 그의 인생이 되었다. 1976년 죽헌 선생의 사숙에서 안진경 서체로 시작으로 모든 서체를 두루 섭렵하고 전각과 문인화 등, 붓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독학으로 갈고 닦은 그에게는 꺼내지 못할 영역이 없다 하겠다.

부모님이 혹시 서예를 하셨느냐고 물으니 아니라고 한다. 그에게는 먹물 유전자가 없다. 어릴 때부터 글을 쓰는 것이 좋았고, 한자가 좋아서 반복해서 쓴 것이 전부다. 나무꼬챙이로 한자사전에 있는 글귀를 땅바닥에 옮겨 적을 때 이미 서예의 길은 시작되었다는 말인데, 독학서생이어서 그의 예술 세계가 더 자유롭고 독창적이었던 게 아닐까 싶다. 김천시 감문면 구야리의 평범했던 소년은 자기만의 서체를 찾아 끊임없는 연습을 반복했다. 의도하지 않았던 즐김이 훈련이 되어 오늘의 율산을 만들긴 했지만, 혼자 힘으로 자기 세계를 일궈 나가다 보면 더러 한계에 부딪치기도 했을 것이다.

“열정만으로는 힘들었을 텐데요. 한계를 어떻게 극복했어요?”

“서예를 버리는 것으로 나를 찾았어요.”

서예는 단순히 글을 쓴다는 개념을 초월해서 예술로 진입한 지 오래다. 담뱃갑 포장지와 편백나무 알갱이, 포도 씨, 앵두 씨 같은 자연의 재료를 서예에 활용하며 그의 예술 세계는 새롭게 태어난다. 남다른 그의 생은 한지를 사러 다니던 필방에서 시작되었다. 그를 눈여겨보던 필방 주인 김진구 씨를 만난 것이 1976년이고, 1979년에 그의 주도 아래 반 타의적으로 ‘율림서도원’의 원장이 되었을 때 그의 나이 약관 23세였다. 그는 배우면서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 작품생활에 심취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타묵’의 삶이 시작되었다. 24세에 첫 개인 전시회를 갖고 일흔일곱 점의 작품을 꽤 높은 가격으로 팔았다고 한다. 그 후 불혹에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부문 초대작가가 되었다. 본격적인 타묵 퍼포먼스는 1997년 울산에서 초대형 붓을 휘호할 사람을 찾으며 시작되었다. 그 후 2000년 봉정사 법요식에서 삭발을 하고 휘호하는 모습이 전국에 중계되면서 본격적으로 타묵 퍼포먼스의 작가로 입지를 굳혔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독학으로 한자쓰기에 취미 붙여

1976년 죽헌선생 사숙으로 안진경 서체 등 모든 서체 섭렵

23세에 '율림서도원' 원장으로 취임 1년후 첫 전시회 개최

불혹 들어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부문 초대작가 영예도

예술로 승화시킨 타묵 퍼포먼스 1997년 울산서 본격 시작

2000년 봉정사 법화식 휘호 모습 생중계되며 작가 입지 굳혀

자고전(自古展). 나로부터 옛 것을 짓는다는 뜻을 지닌 自古展 전시회의 팸플릿을 펼치자 그림 같은 글씨가 살아 꿈틀거릴 듯 생기 있는 모습을 드러냈다. 자세히 보니 여러 팸플릿에 담긴 작품이 모두 큰 글씨와 작은 글씨의 조합이다. 한달음에 써 내린 큰 글씨 주위로 깨알 같이 작은 글씨가 여백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게 만자행(萬字行)입니다.”

만자행은 율산이 자기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일궈낸 작품들의 연작이라고 한다.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한 자씩 정성 들인 글씨를 얼마나 많이 써야 할까. 오래 전에 서예를 배우러 다니며 雙鶴銘(쌍학명) 144자를 전지 한 장에 담은 적이 있어서 서예를 할 때의 그 지고지순한 인고의 과정을 조금은 알고 있다. 깨알 같은 글자 수천만 개보다 일필휘지로 써 내린 큰 글씨가 차라리 편하게 여겨지는 건 글씨가 작다고 쉽게 쓸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만자행의 ‘萬’은 많음을 뜻한다고 했다. 붓으로 쓸 수 있는 가장 작은 글씨로 화폭을 가득 채우는 방식의 만자행을 보고 있자니 세상사의 한 모습이 보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그렇지 않은가. 큰 산이 있고 그 아래 수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그런 모습. 작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림 같기도 한 그 글씨는 분명히 우리네 삶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율산이 만자행을 처음 접한 것은 아버지 회갑잔치 때에 壽자와 福자로 병풍을 만들어 드린 순간부터였다. 천 개의 壽와 천 개의 福으로 이루어진 병풍을 받은 아버지 마음이 어땠을지. 세필로 쓴 작은 글자의 수를 일일이 세어가며 많은 시간을 들여 딱 천 자씩 완성하였다. 아스팔트에 콩을 심듯이 큰 글씨 주위로 작은 글자를 새기며 아버지의 천수를 빌고 복을 빌었을 그 마음이 충분히 짐작된다. 일자일획으로 千壽千福(천수천복)을 써서 오래 살고 만복을 누리라는 뜻의 생애 첫 번째 만자행은 거의 일 년에 걸친 작업이었다. 그 작품으로 병풍을 만들어 아버지의 회갑 기념으로 드렸다. 서예의 새로운 지평을 연 것이 그때부터였다.

“작품을 구상할 때 가장 먼저 염두에 두는 것이 뭔가요?”

“자연입니다. 물과 불, 바람과 구름, 나무와 돌을 비롯한 자연의 모든 것이 작품의 소재가 됩니다.”

그에게는 자연의 흐름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그대로 작품으로 환원된다. 자연을 닮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것. 그게 바로 예술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닐까 싶다. 소설가가 소설을 구상하며 인간의 삶을 생각하고 자연의 흐름과 그 놀라운 변화에 귀를 기울이듯이 율산 역시 인류의 바탕이 된 자연이 그를 이루는 실체임을 온전히 인식하고 있다. 글씨도 음악처럼 빠르고 느리고, 길고 짧은 붓의 움직임대로 흐르는 리듬을 갖고 있다며, 서예는 춤과 리듬이 있는 음악이고 회화는 경음악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 선율은 글이 가진 흐름이나 속도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글씨도 음악처럼 빠르고 느리고, 길고 짧은 붓의

움직임대로 흐르는 리듬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예는 춤과 리듬이 있는 음악이고 회화는 경음악이죠.

그 선율은 글이 가진 흐름이나 속도에서 나타납니다.”

필방 주인 김진구 씨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시작된 율림서도원에서 제자를 양성하고 글씨로 의미를 전달하는 예술의 생을 일구며 30년을 보냈다. 그가 평소에 제자들에게 이르는 말은 ‘네 것을 만들어라!’는 가르침이었다. 자기 것을 만드는 것은 알을 깨는 행위이다. 자신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 인고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고, 그것은 모든 예술가들에게 주어진 운명임과 동시에 의무이고 고통이다. 예술가들에게 피해갈 수 없는 단 하나를 들라면 바로 그 말일 것이다. 자기 것을 만드는 것. 율산서도원에서 봉산문화거리의 도심방산장으로 옮겨 앉으며 율산의 생은 굴곡 많은 격동기를 지나 타묵 인생의 절정에 이른다. 서까래와 흰 회벽이 그대로인 한옥에 갤러리와 작업실이 함께 하고 있어서 그의 작품을 가득 담고 있다.

“인생철학이 뭔가요?”

“무용지용(無用之用)이라고 할까요?”

쓸모없는 것을 아는 자라야 무엇이 참으로 쓸모 있는지 말할 수 있고, 광야를 걷는 자에게는 두 발 둘 곳만 있으면 된다지만, 그렇다고 발 둘 곳만 남기고 주위를 천 길 낭떠러지로 판다면 사람이 그 길을 어떻게 갈 수 있겠느냐는 그 말은, 주변의 쓸모없는 땅이 있기에 두 발이 딛을 땅이 쓸모 있게 된다는 말에서 유래된 無用之用이다. 장자의 ‘외물편’에 나오는 얘기이다. 율산은 쓸모없는 듯싶은 작은 티끌 하나도 흘려버리지 않고 쓸모 있음으로 만든다. 살아온 모든 순간을 예술로 승화시킨 것처럼 그에게는 삶의 매순간이 소중하고, 자연 속의 씨알 하나조차도 그가 이뤄낸 예술처럼 귀하고 귀하다.

율산의 타묵 퍼포먼스는 서예 인구의 저변 확대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인들은 서예를 모른다. 서예는 그저 붓으로 한문을 옮겨 쓴 글씨일 뿐, 그것을 예술로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사각 프레임 속에서 잠을 자는 서예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어 사람들에게 서예는 이런 것이다 하고 보여주는 것으로 율산 리홍재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서예의 실체를 보여준다.

/글 장정옥 소설가(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