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지나간 일과 관계와 사건은 아쉬움을 남긴다. 더 나은 결과와 평안한 관계, 안정적인 사후처리가 가능했음을 깨닫는 것은 언제나 나중이다. 일컬어 ‘사후 약방문’이거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 한다. 차 떠난 뒤에 손 흔드는 것과 같이 만사휴의(萬事休矣) 상태다. 그러나 인간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실패와 좌절을 돌이키면서 우리는 같은 성질의 패배와 절망을 경험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1960년생이 환갑을 맞은 경자년(庚子年)이 저물어 간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시작해서 코로나19로 끝나고 있다. 호모사피엔스가 여태까지 겪지 못한 쓰라린 상처를 지구촌 곳곳에 남기면서 코로나19는 아직도 맹위(猛威)를 떨치고 있다.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지만, 바이러스의 종식(終熄)은 내년 가을 이후에나 가능하리란 것이 중론이다. 나는 열네 살 먹은 인도 소년 아난다의 예언에 500원을 걸었다. 내년 11월에 코로나가 끝날 것이라는!

인류가 눈에 보이지 않는 병원체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기억은 100년 전 일인 성싶다. 1918년에 발생한 에스파냐(스페인) 독감 때문에 세계적으로 2천500만에서 5천만의 인명이 희생된 것으로 전한다. 지난 12월 26일 기준 코로나19 확진자는 8천만, 사망자는 176만에 이른다. 페니실린도 발명되기 이전의 에스파냐 독감과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이 있은 2020년 코로나19의 수평적 비교는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더욱 뼈아프다.

문제는 코로나19의 뒤를 이어 훨씬 강력한 바이러스 침입이 일상화하리라는 암울한 전망이다. 알다시피 1976년 에볼라 바이러스, 2002년 사스, 2012년 메르스에 이은 코로나19의 발생 원인은 인간이 자행한 생물 서식지 파괴다. 지구촌에 거주하는 다수 생명체가 살아가고 있는 거주공간을 인간이 무차별적으로 훼손하고 개발한 결과 무시무시한 바이러스가 창궐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수용된다.

그 원인은 인간의 탐욕이다. 인간의 무한욕망이 불러온 자연 생태계의 무차별적인 파괴와 유린은 반대로 인간의 생명을 옥죄는 카르마로 작용하고 있다. ‘노 마스크’로 일관한 트럼프나 브라질 대통령 보우소나루의 코로나 확진은 인과응보의 성격이 짙다. 정치와 경제의 효능과 이해관계를 위해 대중의 방역과 예방을 소홀히 한 업보를 고스란히 경험한 셈이다. 일본의 전임수상 아베의 행적도 그들과 비슷한 궤도를 보인다.

코로나19의 창궐은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건과 영국의 대처가 깃발을 든 신자유주의 기조로부터 발원한다. 그들은 한물간 19세기 자유주의 정책을 20세기 후반기에 실현하려는 군산복합체의 충실한 정치적 하수인들이다. 그들로 인한 폐해는 지금까지도 온존된다. 20대 80의 사회에서 1대 99의 사회로, 숱한 비정규직과 돌아오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양산(量産)으로 해를 보내고 있다. 이제라도 반성해야 한다.

코로나19로 죽음을 맞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으로 노동자들을 사지에서 구출해야 한다. 가혹한 시련과 아픔을 남긴 경자년이 저물기 전에 우리가 돌이킬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