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시루에 콩나물이 한껏 자랐다.

아내가 관여하는 단체에서 장난감 같은 콩나물시루와 나물 콩을 받아들고 들어왔다. 시루 안 지름이 겨우 12센티밖에 되지 않아 두 식구가 한번 먹을거리도 되지 않을만하게 작았다. 호기심 반, 장난 반의 심정으로 콩을 하루 동안 물에 담갔다 시루에 안쳤다.

시루를 식탁 의자 위에 올려놓고 오가며 심심풀이로 물을 주었다. 며칠이 지나자 콩나물 머리가(대가리가) 커지고 줄기가 나오며 시루 위로 솟구쳐 올라와 무너지려 하였다. 처음 시도하다 보니 요령 없이 콩을 너무 많이 넣은 것이다. 임시변통으로 반 뼘 높이로 테를 매고 나서 사흘이 지나자 또다시 넘어지려고 하였다. 그러자 아내가 묘수를 부린다. 돌아가신 장모님도 이렇게 했다며 짚을 들고 들어와 촘촘하게 묶어주었다. 그러나 자라는 속도를 제어할 방법이 없어 이제 겨우 콩나물 모양을 하고 있는, 넘치는 부분을 뽑아 실로 60년 만에 기른 콩나물국을 끓여 먹었다.

밭이 구멍가게이고 텃밭이 반찬가게이던 1960년대 시골에서는 추수를 모두 끝내고 한해 양식인 김장을 담고 나서는 집집마다 콩나물시루를 안쳤다. 한 번에 안치면 한꺼번에 자라 나중에는 발이 길게 자란 뻣뻣한 놈을 먹어야 했기 때문에 맨 아래에는 생콩을 깔고, 중간에는 하루 동안 물에 불린 콩을, 맨 위에는 싹이 터서 자라기 시작하는 콩을 올렸다. 안방 따듯하고 그늘진 장소에 두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오가는 식구마다 수시로 물을 주어 키웠다. 가지런히 올라오면서 노란 머리에 모자를 반쯤 벗은 모습이 귀여웠다.

추수 후에나 잠시 먹을 수 있었던 하얀 쌀밥을 콩나물국에 말아 김장김치를 올려 먹을 때 정말 맛있고도 행복했었다. 지금도 생각한다. 물질의 풍요 속에 희망을 잃어버린 채 흩어져 지내는 오늘보다는, 조금 헐벗고 배고팠지만 기다리는 희망 속에서 가족 간에 사랑을 나누던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장난감 같은 콩나물시루 하나가 타임캡슐이 되어 육십 년 세월을 갔다 왔다 하게 한다. /류대열(경주시 외동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