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휘 논설위원
안재휘 논설위원

조선 숙종 때 당하관(堂下官) 벼슬에 있던 이관명(李觀命)이 암행어사가 되어 영남지방을 시찰한 뒤 돌아와 왕에게 아뢴다. “황공하오나, 대궐의 후궁 한 분의 소유로 되어 있는 통영의 섬 하나에서 수탈이 어찌나 심한지 백성들의 궁핍이 참혹하옵니다” 숙종은 화를 벌컥 내면서 책상을 내리쳤다. “과인이 그 조그만 섬 하나를 후궁에게 준 것이 그렇게도 불찰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관명은 굴하지 않고, “누구 하나 전하의 거친 행동을 막지 않았으니 저와 대신들을 아울러 법으로 다스려주십시오”라며 엎드린다. 숙종은 화가 치밀어 올라 승지를 불러 전교를 쓰라고 명한다. 그리고는 “전 어사 이관명에게 부제학을 제수한다”고 명했다. 그리고 곧 명을 고쳐 ‘홍문제학’을 제수한다고 했다가, 마지막에 “예조참판을 제수한다”고 다시 명을 바꿨다.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법무부의 ‘정직 2개월’ 징계 결정이 법원에서 뒤집혔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대통령의 재가가 난 징계결과를 일개 판사가 어떻게 뒤엎을 것이냐 하고 벌인 막장 싸움에서 완패했다. 또다시 나타난 여권의 치사한 분기탱천이 기가 막힌다. 어째 이렇게들 끝까지 쪼잔한지 도통 모르겠다.

때마침,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부인 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의 1심 판결도 나왔다. 정 교수는 입시 비리 등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판결에 볼복하는 친여 세력들이 서울중앙지법 재판관들의 이름을 낱낱이 적시하며 탄핵 국민청원을 냈다. 이 청원에 순식간에 3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동의했다니 어처구니가 없는 노릇이다.

‘윤석열 찍어내기’ 집착에 빠진 민주당 쪽의 광기 또한 가관이다. 김두관 민주당 의원이 총대를 멨다. 김 의원은 윤 총장을 국회에서 탄핵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한편 추미애 장관에게 징계위원회를 다시 열어 해임하라고 떼를 썼다. 입법을 통해 검찰의 수사권을 아예 제거하겠다는 격앙된 반응도 등장했다.

이쯤 되면 이 나라는 ‘법치’뿐만 아니라, 국가의 근본 틀인 ‘3권분립’에도 통째로 빨간 불이 켜졌다고 볼 수 있다. 국민청원 놀이터에서 올곧은 ‘판사’들을 쫓아내라고 ‘난리굿’을 치기 시작한 무리는 한낱 패거리 맹신주의에 빠진 외눈박이 좀비들에 불과하다. 선택적 ‘정의’에 만취해 몰려다니는 홍위병 망령의 허수아비들이 이 나라를 망국의 블랙홀로 내몰고 있다.

“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노무현 대통령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검찰”이라는 김두관의 험구에서 ‘검찰 해체’를 노리는 확증편향 조폭 조직의 가없는 복수심 같은 살기마저 읽힌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정작 노무현 대통령이라면 이렇게 외눈박이들의 ‘탄핵 놀이’를 허하지 않았을 것 같다. 임금의 잘못을 탄원하는 당하관 이관명을 단숨에 예조참판으로 임명해 오히려 나라의 큰 그릇으로 쓴 숙종처럼 했을 것이다. 노 대통령이라면 패거리 적개심에 취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검찰총장과 판사들을 물어뜯는 추한 모습을 연출할 리가 절대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