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손경찬의 대구·경북 人
하회별신굿탈놀이 이수자 김종흥 명인

탈춤은 관객들과 한판 어우러지는 재담이라고 말하며, 우리 선조가 살아온 토속적인 풍습을 직시하자고 덧붙이는 김종흥 씨.
탈춤은 관객들과 한판 어우러지는 재담이라고 말하며, 우리 선조가 살아온 토속적인 풍습을 직시하자고 덧붙이는 김종흥 씨.

탈놀이의 신명이 전통이 된 마을에 경사가 났다. 1999년 4월 21일,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한국에 와서 73세 생일을 맞았다. 마을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안동 하회마을 담연재에서 여왕과 함께 생일잔치를 할 사람을 뽑기로 영국대사관과 안동시가 협의를 했다. 여왕과 생일이 같은 사람 다섯 명을 담연재로 초대했는데 그 중에서 하회마을에 살고, 탈춤공연도 하고, 장승목각까지 하는 김종흥 목석원 원장이 여왕과 함께 축배를 드는 사람으로 내정되었다. 세계의 시선이 한자리에 모이는 순간이었다.

그 역사적 현장에서 여왕과 함께 축배를 든 김종흥 명인을 만났다. 그가 준 명함에 백발을 날리며 나무를 쪼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69호 하회별신굿탈놀이 이수자, 국가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 이수자, 대한민국 장승명인’이라는 이력이 씌어 있었다. 하회마을 입구에서 웃는 얼굴로 손님을 맞는 장승들이 모두 그의 작품들이고, 목석원은 명인이 한평생을 보낸 삶의 현장인 동시에 작업장이었다.

 

30년전 인간문화재 이상호 선생 권유로 탈춤 시작
주로 파계승 역할 맡으며 전통 춤사위 지켜와

목각 입문, 자연스레 하회탈 깎으며 장승 제작도
600여 점 장승 작품 중 200여 점은 외국으로 보내

“현대적 감성으로는 다소 괴리감이 느껴질 탈춤
우리 선조가 살아온 토속 풍습으로 바라봤으면”

“하회마을이 고향이세요?”

“하회마을 등 너머 중리에서 살았어요. 중리의 살림을 정리하고 다락 논을 사들여 하회마을에 들어와서 장승을 깎고 탈춤을 추었어요.”

하회별신굿탈놀이의 인간문화재이신 이상호 선생의 권유로 탈춤을 시작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흥으로 시작한 탈춤이 어느 새 30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지역적인 특성이라고 해야 할까. 안동 특유의 문물과 풍습이라고 할 수 있는 농악과 탈춤이 그를 국보적인 광대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즐겨 쓴 것이 중탈이고 양반탈이었다. 하회탈이 국보로 지정된 것이 1965년인데 그때 이미 마을에 하회별신굿탈놀이 전수관이 있었고, 공연장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 1세대 장인께서 하회별신굿탈놀이를 복원해놓으셨다고.

하회별신굿탈놀이의 유래는 먼 고려시대로부터 전해지고 있다. 800년 전에 만든 하회탈의 원형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하회별신굿탈놀이이의 전통 역시 꾸준히 맥을 잇고 있다니 그 뿌리 깊은 탈춤의 역사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코로나 때문에 침체되긴 했지만 지금도 탈춤 공연을 매일하고 있다며, 평일에는 17명 정도의 인원으로 구성되고 주말에는 직장인을 포함해서 25명 정도가 출연한다고 일러준다.

“탈놀이를 할 때 혹시 그날그날 대사나 춤사위에 변화를 줍니까?

“국보로 지정된 탈놀이가 13개나 됩니다. 13개 중에서 탈이 국보로 지정된 것은 하회탈뿐입니다. 마당놀이의 특성대로 간혹 즉흥적인 재담을 곁들이기도 하지만 대사 한 줄 춤사위 하나 바꾸지 않고, 문화재에 등록이 된 그대로 전통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마당놀이를 연상하면 당장 넓은 마당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모습과 둥그렇게 비어 있는 마당에서 탈을 쓰고 춤을 추는 이들의 춤사위가 얼른 떠오른다. 하늘을 이고 땅을 밟으며 관객과 재담을 주고받는 마당놀이의 장면은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한두 번은 보았음직한 장면이다. 예전에 남사당패가 그렇게 놀았고, 그 전통을 이어받아 열린 공간에서 관객과 하나가 되는 우리만의 문화가 바로 놀이마당이다. 예로부터 끊임없이 외세의 침입을 받아온 우리 민족은 삶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활짝 열린 마당에 모여 덩실덩실 춤을 추며 액을 막고 삶의 의지를 되찾았다. 어려울수록, 힘들수록, 흥을 되살려 노래와 춤으로 어려움을 극복했던 민족. 마당놀이는 우리에게 삶의 에너지였다.

“장승도 깎고 탈춤도 추시는데 어느 쪽이 먼저였어요?”

“장승이 먼저였죠. 분재를 하며 나무를 만진 것이 40년인데, 하회탈은 30년입니다. 목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회탈까지 깎게 되었어요.”

그 동안 깎은 장승이 육백여 점이나 된다고 한다. 그 중 외국으로 나간 것이 이백여 점이라며 탈춤 해외공연의 역사도 그쯤 된다고 했다. 장승과 하회탈의 목재가 같은 종류냐고 물으니, 장승은 소나무로 깎고 하회탈은 오리나무로 깎는다고 한다. 소나무와 오리나무의 쓰임새가 다르다. 소나무는 우리네 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이고,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뒷산 언덕바지에 뿌리를 내려 오래도록 마을을 내려다보는 터줏대감 같은 나무다. 소나무의 친숙한 향과 질긴 생명력 때문에 장승을 깎을 때 주로 소나무를 많이 쓴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하회탈은 오리나무로 깎는다고 한다. 겨울 숲을 둘러보면 나뭇가지 끝에 작은 아기 솔방 같은 열매가 달린 나무가 있다며, 그게 바로 하회탈의 재료가 되는 오리나무라고 한다. 소나무처럼 단단하고 재질이 균일해서 틀어지거나 갈라짐이 적어서 하회탈을 만들기에 적절하다고 한다.

“어떻게 해서 나무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까?”

“일찍부터 정원을 가꾸고 조형물 만드는 것을 좋아했어요.”

어릴 때 집 가까운 주막에 장승이 서 있었다고 한다. 왕방울 같은 눈과 주먹코, 뻐드렁니의 단순한 얼굴에 표정이 있다는 걸 알고는, 소나무에 밑그림을 그려서 깎아나가다 보니 투박하나마 표정을 가진 얼굴이 나오더라고 했다. 한낱 나무에 불과한 것이 한 쌍의 장승으로 완성된 순간, 의미를 가진 존재로 등극했다. 초례를 치른 신혼부부가 그러하듯이 한 쌍의 장승 역시 고운 옷을 입혀 합궁을 치르게 한 후에야 마을입구에 세웠다던가. 끌 자국까지 생생한 장승이 투박한 매력의 자유로움을 뜻한다면 하회탈은 주름 하나까지 섬세하게 그려야만 표정이 나올 정도로 정교한 작업이라고 한다. 장승은 못 생긴 얼굴 그대로 민중들의 다양한 표정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하회탈보다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예술로 여겨진다. 이즈음에는 해학적인 요소로 창의적인 작업을 곁들여 전통대로 만드는 지겨움을 덜어낸다며, 장승도 지역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고 귀띔해준다.

“탈춤을 출 때 어떤 역을 맡으세요?”

“양반과 파계승을 골고루 맡지만 파계승을 더 많이 합니다.”

왜 파계승일까? 체격과 표정의 전달 면에서 파계승이 더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힘들게 나무를 깎아서 장승을 만드는 것처럼 탈춤을 추는 그의 춤사위 역시 온몸으로 살아온 사람만의 풍부하고도 곡진한 삶이 배어있기 때문에 공연장에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게 아닌지. 파계승의 탈을 쓰고 불교와 승려의 타락을 풍자로 꼬집는가 하면 양반탈을 쓰고 양반계급의 위선과 독선을 풍자로 조롱하며.

 

“탈이 국보로 지정된

것은 하회탈뿐입니다.

간혹 즉흥적인 재담을

곁들이기도 하지만

대사 한 줄 춤사위 하나

바꾸지 않고, 문화재에

등록된 그대로 전통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어릴 때 동네 풍물놀이에 끼어들던 그 흥을 어쩌지 못하고 김종흥 명인은 30년 동안 탈춤을 추며 살고 있다. 여왕이 탈춤을 보며 발로 장단을 맞추고 어깨를 들썩이며 흥을 돋우더라며 웃는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일 테니 오래 기억할 만하다. 여왕에게도 특별한 경험이었을 것 같다.

“탈춤이 안동 브랜드로 자리 잡은 것이 언제부터예요?”

“고려 중엽 때부터 당제를 지내며 마을을 지키던 전통이 식민지 시대에 잠깐 맥이 끊겼다가 해방이 되고 복원되었어요.”

명함에 씌어 있지 않지만 자신이 당제를 지낼 때 제사장에 해당하는 산주라고 귀띔해준다.

“산주는 어떤 일을 하죠?”

마을에 궂은 일이 있을 때, 혹은 정원대보름 동제를 지낼 때 산주는 보름 전부터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제사를 준비한다. 산주가 주산에서 성황신의 내림을 받아야 탈놀이를 시작할 수 있다. 본격적으로 하회별신굿놀이가 벌어지면 산주는 제를 올리며 신이 내려오기를 기다린다. 신이 무동을 타고 내려오면 집안에 액이 있는 사람이 재물을 건네며 소망을 비는 것으로 하회별신굿탈놀이의 10마당이 시작된다.

산주로 지정되면 죽을 때까지 그 직함을 가지고 마을을 지켜야 한단다. 마을에 큰 재앙이 닥쳤을 때 산주를 중심으로 광대들이 모여 하회별신굿탈놀이를 한다고. 그날만은 하회탈을 쓴 광대들이 피지배층의 입장이 되어 풍자와 해학으로 지배계층의 잘못을 맘껏 꼬집으며 할 말을 다 한다며, 지배계층의 양반들 역시 그 탈놀이를 보며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계층 간의 불화와 갈등을 씻는다고 한다.

오늘날까지 관광 상품화된 탈춤은 고려시대 이후 줄기차게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탈춤은 그대로 관객들과 한판 어우러지는 재담이라며, 김종흥 명인은 현대적 감성으로는 다소 괴리감이 느껴질지 모르지만 우리 선조가 살아온 토속적인 풍습으로 바라보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뒤를 이을 제자를 키우고 있느냐는 물음에 명인은 민속학과를 전공한 아들을 가르친다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한다. 가까이에서 보고 자란 사람만큼 잘 배운 사람이 있을까. 한길을 걸어가는 아버지와 아들의 미래가 훤히 보인다.

/글 장정옥 소설가

(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