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에 비친 겨울 동리산과 태안사. 태안사는 전남 곡성군 죽곡면 태안로 622-215에 위치해 있다.

유순한 보성강 줄기를 따라 겨울 햇살이 반짝이며 따라온다. 보성강을 건너 잡목숲사이로 접어들자 차는 마른 먼지를 일으키며 힘들게 나아간다. 그토록 그리던 태안사 가는 길은 온통 그리움에 젖어 있다.

작은 주차장에 차를 세운 건 지붕 있는 다리, 능파각 때문이었다. 정면 1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한 능파각은 850년 혜철국사가 지었지만 파손되어 1767년에 복원했다. 누각이면서 다리의 역할을 동시에 해내는 아름다운 건축물에서 선인들의 여유와 풍류를 읽는다. 능파각 아래로 펼쳐지는 계곡의 풍경과 물소리에 저절로 번뇌가 사라진다. 나는 큰길을 두고 능파각에서 일주문까지 이어지는 옛길을 걷기로 했다.

피안으로 가는 길이 있다면 이렇지 않을까. 차고 딱딱한 시멘트 길이지만 이상하게 편안하다. 낙엽하나 떨어져 있지 않은 정갈한 길, 곧게 뻗은 전나무들의 선한 눈빛과 인사를 나누다 보니 일주문이 보인다. ‘동리산 태안사’, 일주문 편액에는 그린 듯 편안한 성당 김돈희의 서체가 담겨 있다. 고전적인 묵직함보다 세련미가 돋보이는 서체와 잘 어울리는 사찰이다.

산세가 오동나무 속처럼 아늑해서 오동나무 속이라는 뜻을 가진 동리산, 그 깊은 곳에 보금자리를 꾸민 혜철국사의 풍수적 안목은 가히 뛰어나다. 사찰은 지나치게 웅장하거나 화려하지 않으며 중용의 도리를 몸에 익힌 군자처럼 기품이 넘친다. 부드러운 고요 속에 잠든 경내, 내 발걸음 소리에 산사가 깰 것만 같아 조심스럽다.

화엄사의 말사로 대안사(大安寺)라고도 불린 태안사는 신라 경덕왕 원년(742년)에 세 분의 신승(神僧)이 창건하였다. 백여 년 뒤 문성왕 9년(847년), 적인선사 혜철국사가 동리산문을 열고, 고려 태조 때 광자대사가 중창하여 동리산파의 중심사찰로 삼았다. 조선 초 효령대군이 머물기도 했으며 송광사와 화엄사를 말사로 거느릴 정도로 사세가 컸지만 6.25전쟁 때 전각이 불타 대부분 복원한 것이다.

겨울 산사답지 않게 바람 한 점 없이 안온하다. 풍경마저 잠든 고요한 경내를 걷는 동안 알 수 없는 그리움이 가슴을 파고든다. 흔한 법구경이라도 흐를 법한 휴일, 절은 굳게 침묵하고 있다. 선원으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는 꼿꼿한 자존심과 시대에 편승하지 않는 올곧음이 보인다. 단청 없는 염화실과 선원, 머리 숙여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혜철국사의 부도비, 독백처럼 흐르는 기운들 속에 붉은 열매를 맺은 남천이 인적 없는 산사를 지킨다.

보제루에는 사계를 담은 사진들이 쓸쓸히 축제를 벌이고 목어의 눈빛은 먼 곳을 더듬는다. 우리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고 추구하던 고결한 정신과 영혼은 어디로 갔는가? 우리는 무엇을 향해 떠밀리듯 가고 있는가? 물질과 정보의 홍수에 밀려 철학의 빈곤으로 신음하는 사회, 그 아픔조차 무디어가는 현실이 안타깝다. 내 불안한 상념과 달리 태안사는 조급함에 휘둘리지 않고 확신에 찬 듯 초연하다.

대웅전 법당 문을 열자 일렬로 걸려 있는 스님들의 가사가 유난히 따스하게 안겨든다. 정갈하게 깔린 카펫, 은은한 자연 채광으로 인한 아늑함에 이끌려 백팔배를 시작한다. 혜철선사와 도선국사가 득도한 수도 도량, 무아 무소유의 삶을 몸소 보여주신 선지식 청화 스님의 아름다웠던 시간들, 그 때의 영화가 다시 태안사에 머물기를 기도한다.

수년 전 정만 스님이 스승이신 청화 스님의 수행법에 관한 책을 주시면서 맺게 된 작은 인연이 오늘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장좌불와(長坐不臥)의 수행과 고매한 정신과 인품으로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던 청화 스님, 생전에 친견한 적은 없지만 서적과 법문을 통해 감동 받은 후 나는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빠져들게 되었다.

조낭희 수필가
조낭희 수필가

염불심시불(念佛心是佛), 참다운 진리는 우주에 가득 차 있어서 부처를 생각하는 그 마음이 곧 부처일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 좋았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분별과 시비심에 사로잡혀 중생의 선을 조금도 넘지 못하고 있다. 부처와 중생의 차이를 아는 것은 쉽고 간단한데 그 경계를 넘는 일은 이토록 어려운 일이다.

마음과 부처는 둘이 아닌데 내 구분하는 마음은 언제쯤 내려질 것인가. 날마다 백팔배를 하면서도 뜬구름 같은 감정에 휘말려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놓치고 살아가는 나를 돌아본다. 쉽다고 일러주신 스님의 말씀과 달리 근본자리를 지키는 일은 멀고도 험하다. 오늘만큼은 청화 스님을 기리며 참마음으로 시주를 하고 기도를 한다.

법당을 나오자 태안사의 반듯한 어깨 위에 얹힌 밝은 미래가 보인다. 200여 미터 산길을 오르면 한 때 수행하는 스님들로 북적였던 선원이 있다고 들었지만 애써 궁금함을 누른다. 우주의 기운은 모든 중생을 본래의 성품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목적의식을 갖고 있다니 부질없는 걱정일지 모른다. 다만 동안거에 들어간 스님들의 용맹정진을 조용히 응원할 뿐이다.

청화 스님이 중창불사를 할 때 젊은 스님들이 손수 지겟짐을 져나르며 만들었다는 연지, 커다항 연못 안에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삼층석탑과 태안사가 스스로를 비추고 있다. 두 손을 모으고 아미타불을 외며 연못을 돈다. 염불과 참선은 둘이 아니라는 청화 스님의 말씀이 내 어깨를 토닥인다.